여기 '곤이'라는 눈물 많은 남자가 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셋 중 한 명은 그를 잘 우는 남자라고 할 만큼 눈물이 많지만 그가 언제나 잘 우는 것은 또 아니다.
국민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넘어가는 어느 해, 가마솥에 끓던 물이 그의 손에 엎어졌다. 한 쪽 팔이 절반이나 화상을 입어 꽤 긴 시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수업료를 안 가져 왔다고 되돌려 보내는 학교였지만 못 가게 되니 약간 아쉽기도 했더랬다. 흉터는 크고 깊게 남았다. 드디어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었고 얼마 뒤, 시험을 봤다. 원래도 썩 잘 보지 못했을 시험이긴 했지만 하나도 모르는 말 투성이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빵점을 맞았다. 애들 앞에서 담임선생님은 빵점임을 너무 크게 말했고 바보같은 자식들은 그를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러나 눈물 많은 이 남자는 울지 않았다. 그가 시험 때문에 운 건 20년쯤 후, 딸아이가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왔을 때였다.
드디어 신발 앞코에 구멍이 났다. 이 순간을 그가 얼마나 기다리면서도 두려워 했던가. 새 신발을 가질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신발 사달라고 할 사람이 없다. 형은 사우디에 있고 형수에게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둘째 누나 의상실에 가볼까 했지만 팔린 옷 값이 신발 값보다 적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교복을 입은 뒤로 구멍난 양말이 부끄러웠던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 그이지만 구멍난 신발 사이로 마주하는 엄지발가락은 자꾸 얼굴을 뜨겁게 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 가장 비참한 남자가 되려던 차에 생각지도 않게 셋째누나가 하얀 새 운동화 하나를 덜컥 사주었다. 그리고 처음 신고 간 그 날, 하얀 운동화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쉬는 시간마다, 학교가 끝난 후에도 찾아 헤맸지만 남은 거라곤 어느새 또 구멍 난 양말뿐.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버리지 않았던 앞코 나간 운동화를 신고 간 날 그는 알았다. 나만 보면 눈을 못 마주치는 옆반 그 녀석이라는 것을. 한 대 칠까, 교무실에 갈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다음 날의 다음 날에도 그냥 앞코 나간 운동화 채였다. 큰 맘 먹고 새 운동화를 사 줄 누나도 없는 녀석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쁜 놈, 저도 나를 알면서.' 그리고 그날의 자기들만큼 자란 자식이 있던 해 동창 모임에서 여전히 눈을 못 마주치는 녀석을 보고 온 날, 그는 조금 늦어서 식은 눈물이 났다.
몸과 마음이 아팠던 어머니, 환갑에 두 살 아래 동생을 봤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기억이 되어가던 열아홉, 대학 진학반이던 고3 여름, 실습 나간 친구들 대신 빈 책상만 남아있는 실습반에 혼자 앉아있었다. 대학은 꼭 가게 해 줄테니 걱정말라며 그 몫의 논을 팔아 바람처럼 떠나버린 둘째 누나를 원망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실습반 친구들이 다 가진 자격증도, 희망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세상이 던진 그리 튼튼하진 않은 동아줄 덕에 열아홉 늦가을에 취직을 했다. 라면 5봉지 먹는 것은 우습던 그 때, 점심 값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갔다. 형, 형수, 조카들, 동생이 같이 살던 집엔 아직 점심 때이건만 밥이 없다. 도시락 한 번 싸준 적 없는 형수랑 살면서 참 둔하기도 했다. 사발로 몇 번 물을 들이키고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차라리 회사에서 물을 마실 걸 그랬다. 퇴근 후 양말을 빨 때도, '땀똔땀똔' 하는 조카들 간식 사가면서 마른 침만 넘길 때도 그는 울 줄 몰랐다. 그러던 그가 운 건, 과일 한 가득 담긴 쟁반이 있는 식탁에서 요리 잘 하는 아내가 해 준 밥에서 엄마가 해 줬던 밥맛을 느낀 날이었다.
6남매 중 다섯째이지만 맏이같이 살았던 남자. 태어난 다음 날 동사한 강아지를 땅에 묻고 밥을 먹지 못하는 남자. '엄마'라는 말의 '마'를 할 즈음에는 목이 메이는 남자. 곤이라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