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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박인식

클레어 키건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2024년 5월 31일


지난 연말, 온라인에서 꽤 많은 이들이 호평 일색의 소감을 쏟아낸 소설이 있다. 언론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도 같은 보도를 쏟아냈다. 한 세대에 한 명이나 나올까 싶은 대단한 작가라는 극찬에서부터 세계적인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소식까지. 추천사라는 게 워낙 그런 것이기는 해도 “핀셋으로 뽑아낸 듯한 정교한 문장”이라거니, “소설이 끝날 때 우리가 감히 이 세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 얻게 된다”는 평가를 읽다 보니 이 책이 궁금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전체 분량이 백여 쪽을 조금 넘는, 단행본으로 출간하기엔 예외적으로 짧은 이 소설은 이백여 년 전 아일랜드를 무대로 펼쳐진다.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는 아일랜드의 한 도시에서 석탄 장사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펄롱은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간다. 펄롱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일찍이 고아가 되었지만, 마음씨 좋은 이웃의 도움으로 따뜻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침, 펄롱은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창고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불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걸 알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수녀원과는 어울리지 않게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을 박아놓고 쇠창살을 세워놓은 걸 보면서 의아했던 펄롱은 본능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안정된 생활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일에 휘말리지 말라고 강하게 말린다. 이웃들도 수녀원이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어리석게 그들과 척지는 짓을 하지 말라고 말린다. 그런 와중에 펄롱은 곤경에 처해있는 여자아이를 보고도 수녀원장의 눈길을 의식해 도움을 청하는 그 아이를 끝내 외면하고, 나와서는 아무 일 없던 듯 미사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위선을 탓한다. 그랬던 펄롱이 결국은 다시 수녀원을 찾아 여자아이를 구해 나와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이 소설은 작품의 배경이 된 이백여 년 전부터 무려 칠십여 년에 걸쳐 여자아이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감금한 채 노역과 성폭력으로 학대한 ‘막달레나 세탁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아일랜드 정부는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아무런 조치도 사과도 없이 외면해오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사과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이야기이기는 해도 그리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도 아니고 그런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이 한두 개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주인공 펄롱이 자기 위선을 깨닫고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위험이 따르는 일에 용기를 내어 뛰어들어야 할지 딸들과 가정을 위해 침묵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것도 이런 작품이면 으레 등장하는 클리셰에 지나지 않는다.


내 눈에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이 소설이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해 보이고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출판사 소개 글에서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렸다”고 평가하던데, 이만한 일에 그 정도 고뇌가 없을 수 없고 작품에서 그런 주인공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렸다고 할만한 표현도 찾을 수 없었다. 앞서 인용한 “핀셋으로 뽑아낸 듯한 정교한 문장”이라는 평가는 도대체 어느 문장을 말하는 것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곳곳에서 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눈에 거슬렸다. 개조식 문서에서나 쓰일 법한 ‘등’이라는 말이 여러 곳에 보이고 (사탕 한 통, 와인 한 병, 재킷 ‘등’을 선물 받고) 입말(구어체)이 아닌 글말(문어체)이 적지 않아 읽기가 몹시 불편했다. 크리스마스 때 널리 부르는 ‘참 반가운 성도여’라는 성가곡을 ‘아델레스 피델레스’라고 쓴 걸 보고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설마 모르고 옮기기야 했겠는가마는.


이 소설을 처음 읽고 나서 남은 것은 이 같은 의문뿐이었다. 그래도 신뢰할 만한 이들이 감동했다거니, 연말에 곤경을 당한 이웃을 생각하며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거니 하며 추천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을 때 발견하지 못했던 몇 가지 덕목이 보이기는 했다. 시종일관 감정의 과잉이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있고,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독자 스스로 찾게 했고, 불의에 항거하는 화려하고 격렬한 모습이 아니라 그저 구해낸 여자아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마무리해서 이후의 모습을 독자들이 상상하게 했다는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그게 그토록 호평 일색의 평가를 받고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만한 이유인지는 아직도 공감되지 않는다.


이젠 쌓을 나이가 아니라 없앨 나이이다 보니 책 한 권도 짐스럽다. 그래서 어지간한 책은 전자책으로 보려고 애쓰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해외 근무 시절부터 전자책을 읽어왔으니 꽤 오래 지났는데도 아직도 전자책은 낯설고 불편하다. 혹시 그런 불편함 때문에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것도 두 번 읽게 만든 이유였을 것이다.


“핀셋으로 뽑아낸 듯한 정교한 문장들은 서로 협력하고 조응하다 한 방에 시적인 순간을 탄생시킨다”는 평가는 한국 작가의 추천사에 들어 있는 표현인데, 그래서 당연히 번역본을 대상 삼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을 읽도록 어디서도 그럴만한 표현을 찾지 못하다 보니 혹시 추천사를 쓴 작가가 원전을 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분량이라고 백 쪽 남짓하니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을 것 같아 일단 주문을 넣었다. 과연 ‘Small Things Like These’라는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길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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