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돌아올 때만 해도 더 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직장인으로 사십 년 넘게 일한 것만 해도 엄청난 복인데, 거기서 더 바라는 게 욕심이기도 했고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쉰다는 게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늘 뭔가 이루기 위해 애쓰고 마음 졸이는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을 뿐. 사실 일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문제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일을 만드는 게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더라는 말이다.
그저 열심히 시키는 일만 하면 되었던 시간은 직장생활 시작하고 십 년 남짓하지 않았을까. 그 이후로는 일하는 것보다는 일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랬는데도 일을 이룬 것보다는 놓친 게 훨씬 많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내 자질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게 은퇴는 물러남보다는 밀려남에 더 가까웠다. 섭섭했지만 한편으로 시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 잘 지냈다. 읽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아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얹혀사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든 작든,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수십 년 사회에서 내가 감당하는 몫이 있었는데, 어느새 짐이 되어 다른 이들의 어깨 위에 얹혀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 생각이 들고나서부터 하루하루가 힘겨웠다.
그게 벌써 삼 년 전 일이 되었다. 운 좋게 다시 일할 기회를 얻었고, 이젠 내 장기이자 본업인 일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일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조바심이 나지는 않는다. 일을 만드는 건 내 몫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고 지낸다.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렇게 했는지 되돌아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렇게 살았으면 기쁜 마음으로, 그렇지 못했으면 내일은 좀 더 잘하겠다는 결심으로 잠자리에 든다.
어제 수난절 사경회 첫 번째 집회의 주제는 ‘소명의 영성’이었다. 여러 말씀 중 비수가 되어 꽂힌 것 하나는 “소명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 평가된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내 몫이 아니더라는. 그걸 일찍 깨달았으면 사는 게 좀 편했을까?
남들을 어깨 위에 얹고 살다가 남들 어깨 위에 얹혀산다는 걸 깨닫고 힘겨워하던 때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에서 기가 막힌 작품을 만났다. 움직이는 조형물이었는데, 원반 위에 얹힌 물체에 바로 내 자신이 이입되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