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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2025.05.29 (목)

by 박인식

사우디 근무를 받아들이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새로운 시장’이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것이 준비 안 된 이의 망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절실한 마음이었다. 당시 천신만고 끝에 새로운 분야에 발을 내딛고 기왕 해오던 사업도 전열을 정비해 곤경에 빠져 있던 부서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시장이라는 게 늘 요동치는 것이니 뭔가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때마침 사우디 현지법인 설립 이야기가 나왔고. 물론 선뜻 응하지는 못했다. 젊었어도 망설일 일을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에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우디에서 돌아오는 게 곧 은퇴일 것으로 생각했다. 다 말아먹고 돌아온 것이 부끄러워 얼굴을 보이지도 못하고 지내다가 뜻밖에 후배들의 배려로 다시 일할 기회를 얻었다. 잠시 현장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이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한 일이다. 그러니 아침에 출근할 생각으로 왜 마음이 설레지 않겠는가.


계약이 지척이었던 일이 경쟁사로부터 일격을 당해 주춤거리고 있다. 다행히 체코 회사와 이야기를 끝낸 상태에서 일이 터진 것이었고, 처음엔 주춤거리던 그들이 계약이 미뤄지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준비를 서두르고 나섰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면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한 행간에서 상당한 의미가 읽힌다. 그래서인지 겉으로 드러난 상황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더구나 현지 업체가 원 발주처의 자회사이니 말이다. 경험상, 말은 아무 소용없고 그저 돈이 오가야 실체가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더라.


많은 인원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지만 차근차근 준비했으니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본진이 투입되었을 때 고생하지 않도록 준비상황도 돌아보고, 함께 일할 상대 업체의 사람들과 신뢰도 쌓아야 할 것이고.


당장은 고전하고 있지만 여러 곳에서 같은 사업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 일을 잘 마치면 우리나라에 없던 사업 모델이 하나 만들어지는 셈인데, 그것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시장에서 한동안 성과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오래전에 새로운 시장 하나를 열어보겠다고 떠나서는 십수 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와 후배들에게 면목이 없었는데, 이것으로 그 빚을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장면을 필사했다. 나 같은 장삼이사와는 무관한 일이기도 하고, 자식이 소유일 수 없는데 마치 소유물을 내놓으라는 것처럼 번제를 요구하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점점 크게 들어가서 이 구절을 지나면서도 예전 같은 감동은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살면서 ‘여호와 이레’를 경험한 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냥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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