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와서 놀러 다니고 구경 다닌 이야기만 올리니 내가 놀고먹는 줄 아는 사람도 생기겠다. 세상에 그렇게 하는데 월급 주고 비싼 돈 들여서 출장 보내는 회사가 어디 있겠나.
여느 원전 사업이 그렇듯 체코 원전 역시 지질조사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지질조사 결과로 설계 정수를 구한 후 설계에 들어간다. (물론 그 복잡한 과정을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프랑스의 이의 제기로 계약이 미뤄졌는데도 발주처에서는 사업 착수에 필요한 인허가와 지질조사를 계획대로 진행하겠다고 천명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래야 계약이 미뤄져 생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계약이 미뤄진 것과 무관하게 준비를 계속했다.
이번에 우리는 지질조사를 수행하는 체코 업체에 기술 자문을 제공하는 형태로 참여한다. 졸업하고 국책연구소에 입사했을 때 처음 참여한 사업이 1980년 월성 원전 후속기 지질조사였는데, 그 후로 사십 년 넘게 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 당시에는 우리 역량이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해 외국 업체의 기술 자문을 받아야 했다. 그 후로도 사오 년 더 그렇게 일했으니 사십 년 만에 배우던 처지에서 가르치는 처지로 올라선 셈이다.
연구소에서 삼 년 가까이 원전 조사를 하고 지금 회사로 옮겼는데, 공교롭게 우리 회사가 다시 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회사 말고도 원전 지질조사를 수행한 업체가 몇몇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일해오고 있는 회사는 우리가 유일하다. 그러다 보니 원전 지질조사 분야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가장 많은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1979년 미국 쓰리마일아일랜드 원전에서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이후로 미국은 원전 건설을 멈췄고, 엄청난 전력이 필요한 데이터센터가 생기고 난 지금에서야 다시 원전 건설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절대 강자였던 미국이 주춤거리는 사이 세계 원전 산업계는 무주공산이 되었고, 그 자리를 우리 나라가 차지했다. 원전 건설 실적은 세계에서 우리와 비교할 나라가 없다는 말이다. 원전 지질조사로는 우리 나라에서 우리 회사가 으뜸이니 결국 세계에서도 으뜸인 셈인가? 아무튼 그게 사실이다. 한 마디 더 달고 싶으나, 여기까지.
그렇게 사십 년 넘게 쌓은 내공을 지금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다. 후배들과 함께 경험이 없다시피 한 체코 회사가 이 사업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준비 단계부터 참여해 힘을 보태는 중이다.
그런데 일하라고 내준 사무실이 무슨 운동장만 하다. 함께 서류 작업을 하는 이들은 모두 여성이고.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없으나 네 시가 넘으면 더 일하겠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파장 분위기이다. 육아 때문에 두 시에 퇴근하는 여성도 꽤 많은 모양이다. 이래저래 낯선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