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목요일. 이제 내일 하루 남았다. 함께 일하기로 한 체코 회사가 발주처와 계약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우리가 그 회사와 맺을 계약 조건도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내일 기술진과 만나 구체적으로 양사 역할을 어떻게 나눌지 의논하고, 계약 세부 사항 몇 가지만 조율하면 출장 목적은 거의 달성하는 셈이다.
언젠가 고백했듯, 나는 일하는 건 겁나지 않은데 일 만드는 게 늘 부담스러웠다. 이번 출장에서는 일도 하고 일을 만들기도 해야 해서 부담스러울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편안하게 일을 마치게 되었다. 일을 이루는 게 내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지만, 최근에서야 비로소 몸과 마음으로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런 생각의 변화 때문에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계약이라는 계약서 서명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 돈이 오가야 비로소 계약이 실체가 되는 것이다. 양사가 계약 조건에 합의하기는 했으나 계약서에 서명한 것도 아니니 아직 계약을 거론하기 이른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이번 출장비 전액을 상대사가 지불한 것으로 계약 의지를 확인한 정도에는 이르렀다고 볼만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출장이 걱정했던 것만큼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이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이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걸 내가 더욱 성숙해졌기 때문인 걸로 착각하는 꼬락서니라니.
엊저녁 시간을 혼자 보냈다. 오늘은 일이 어지간히 끝나기도 했고 그동안 힘들기도 했어서 조금 일찍 마치기로 했다. 내일도 회의가 오래갈 일이 없으니 오후 일찍 마칠 것이다. 후배들더러 내일 회의 시간 말고 나머지 시간에는 날 찾지 말라고 했다. 나는 따라다니기 힘들고 후배들은 영감 모시고 다니기 힘들 것이니 이거야말로 윈윈 아닌가.
출장 떠날 때 호기롭게 전자책 리더기를 들고 나섰는데, 올 때 항공기 안에서 읽은 게 전부이다. 시원한 곳에서 밀린 책이나 읽어야겠다.
[덧글 하나]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남유럽이나 동유럽 국가들은 우리보다 형편이 못하다. 그래서 동유럽인 체코가 여러 가지가 우리보다 낙후되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동유럽으로 분류하는 게 맞나?) 제대로 살펴볼 여유가 없었던 지난번 출장과 달리 이번에는 이들 사무실에서 이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이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분야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저 겉으로 느끼기에는 서유럽 여느 나라와 다를 게 없다. 분위기도 그렇고 질서 측면에서도 아이들이 사는 독일과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다. 사무실 건물은 오히려 더 감각적이고 예술적이다. 내가 사진에 제대로 담지 못해서 그렇지.
[덧글 둘] 이곳 직원 식당은 음식을 골라 계산대 앞에 있는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만큼 돈을 낸다. 말하자면 채소나 고기나, 날것이나 요리한 것이나 단가가 모두 같다는 말이다. 그게 합리적인가 잠시 생각해봤지만, 뭘 먹든 얼마를 먹든 똑같이 돈 내는 뷔페보다는 오히려 합리적이겠더라. 밥 먹으러 가서 밥은 안 먹고 별걸 다 생각했다.
[덧글 셋] 사무실 빌딩 앞에 자동차를 말뚝에 꽂아놨는데, 오늘 보니 글쎄 그 자동차가 몸을 막 비틀고 그런다. 잠시 숨 돌리느라 창밖을 내다보다가 허깨비를 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