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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2025.06.20 (금)

by 박인식

체코에는 원전이 두 곳 있다. 1980년대에 운영을 시작한 두코바니 원전은 용량 500MW급 4기, 2000년대 초에 운영을 시작한 테멜린 원전은 1GW(1,000MW)급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원전 건설 경험이 없지는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두 곳 모두 소련이 건설하거나 소련 모델을 변형한 형태여서 체코 산업계나 기술진 중에 이를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번에 자국이 돈을 들여 증설하는 원전을 그냥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이번에 두코바니 5, 6호기를 증설하는 데 이어 앞으로 테멜린 3, 4호기와 두코바니 7, 8호기도 증설을 고려하고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이번에 자국 업체가 많이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마치 우리나라 70년대 상황과 흡사한 상황이다.


하겠다는 의지는 좋은데, 원전이라는 게 어디 경험 없는 사람이 뛰어들 만큼 호락호락한 일이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미국 기술진의 도움을 얻었듯 이들도 도움이 필요하고, 그 일을 우리가 하게 된 것이다. 80년대 초반에 미국 기술진의 지도를 받아 가며 일을 배운 사람으로서 이제 누군가를 지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니 감회가 새롭지 않을 리 없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고용되어야 할 처지여서 상대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고 우리와 다르다고 이야기해야 했다. 자칫 자존심이라도 상해한다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는 일이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어제까지 해서 회사가 갖추어야 할 시스템을 구축해 주는 일을 마쳤다. 너무 순조로워서 오히려 의아할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상대 회사 사람들이 얼마나 협조적이고 친절했는지 모른다.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어떻게 해서든 맞춰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무척 고마웠다. 돈 주고 부리는 일이니 까탈스러워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오늘은 현장에서 함께 일할 기술진들과 구체적인 수행 계획을 의논해야 했다. 서로 잘 알고 있는 일이니 말이 잘 통할 것 같아도, 그래서 더 어렵기도 하다. 기술자들은 자기 전문 분야에 관한 한 자기와 다른 생각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기술자만의 묘한 고집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선히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여 화기애애하게 의논을 마칠 수 있었고, 그게 우리가 초대한 점심 식사까지 이어져 아주 매끄럽게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기는 한데, 그래도 마음 놓기는 아직 이르지 싶다. 일이라는 게 이렇게 원만하게 진행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가 한 번은 일이 엎어진다고 할 만큼 큰 고비가 올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아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될 일이다.


기술적인 협의야 굳이 준비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내겐 익숙한 일이고, 질문하는 사람들과 묘하게 합이 맞아서 세 시간 가까이 논의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들은 회의할 때 칠판보다 종이에다 쓰는 걸 좋아한다. 해보니 지워가며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다시 정리하는데 시간 쓸 필요도 없고. 설명하다가 문득 내가 선생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신이 나더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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