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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바덴의 조용한 거인, 한국인 베이스 박영두

월간리뷰 2025년 6월호 인터뷰

by 박인식

비스바덴의 조용한 거인, 한국인 베이스 박영두

극장 종신 성악가가 들려주는 삶과 음악의 이야기


월간리뷰 김종섭 기자

2025년 6월호


오랜 무대, 고요한 사람


유럽 오페라의 무대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고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오고 있는 한국인 베이스가 있다. 독일 비스바덴 극장에서 종신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영두. 그의 활동은 언뜻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끈기와 열심이 점철된 땀의 흔적이다. 무명 시절을 거쳐 극장의 중심이 되기까지 그는 묵묵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자신의 음악과 삶을 쌓아왔다. 화려한 주목보다는 신뢰받는 이름으로, 단 한 극장에서 10년 이상 메인 솔리스트로 살아가는 삶은 그 자체로 치열하고 아름답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음악보다 더 깊은 ‘사람’의 결을 만나게 된다.


쾰른에서 시작해 비스바덴까지


2014년부터 비스바덴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온 박영두는 조용히, 그러나 선명하게 자신의 여정을 풀어놓는다. 2010년 쾰른 오페라 스튜디오에서 솔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지금의 비스바덴 극장장이 쾰른에 있었고, 그의 권유로 함께 비스바덴으로 옮기게 되면서 비스바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시작에는 짧지 않은 히스토리가 있다.


베를린에서 활동 중이던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을 소프라노 손지혜로부터 소개받았고, 이를 계기로 쾰른 오페라 스튜디오를 알게 된다. 그 인연으로 쾰른 오페라 스튜디오에 자리가 났을 때 사무엘 윤의 도움을 받아 오디션을 볼 수 있었고, 결국 합격하게 되면서 독일에서의 활동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박영두는 한스 아이슬러 대학생 신분이었고 아직 1년 과정이 남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극장에 취직하게 되었고, 스튜디오에서 공부하는 한편 학교에 다니며 졸업할 수 있었다.


오픈 스튜디오 선발 인원은 각 파트 별로 한 명씩, 총 7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중 실제 단원으로 채용되는 경우는 한 명, 많아야 두 명 정도에 불과한 좁은 문이었다. 그런데 타인의 불행은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고 행운이 될 수 있는 법, 사실 수많은 스타가 정상적인 코스로 스타가 되기보다 배우가 아프거나 빠질 때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일종의 대타 스타가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쾰른에서 돈 조반니 공연 당시, 갑작스레 기사장 역을 맡았던 성악가가 몸이 아파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부랴부랴 다른 대타를 찾았지만 웬걸, 그 대타마저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바람에 극장은 난리가 났다. 결국 극장 측은 오픈 스튜디오 연수생이었던 박영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단 하루 만에 가사를 모두 외워 무대에 올랐다. 그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오픈 스튜디오 종료 시점에 7명 중 유일하게 정단원으로 선택되었다. 기적 같은 공연이었다.


이후 2년 계약이 연장되면서 4년 동안 쾰른 극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 번의 도약이 그의 인생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영두를 마음에 들어 했던 극장장이 쾰른에서 정년을 맞아 비스바덴으로 옮기게 되면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함께 옮기게 되었다. 물론 그 모든 배경에는 사무엘 윤의 도움과 신뢰가 있었다. 한스 아이슬러에서 학업을 마치고 5년 만에 비스바덴으로 간 그는, 10년 계약을 맺고 집까지 마련하며 그 도시에서 자리를 잡았다.


비스바덴이라는 도시, 그리고 음악적 중심


비스바덴에는 5월마다 축제가 있다. 세계적인 가수들이 무대에 오르고, 규모 또한 대단한 축제다. 박영두는 이곳에서 메인 베이스 솔리스트로서 가장 큰 역할들을 맡아왔다. 비스바덴은 그에게 단순한 직장이 아니라 레퍼토리를 쌓고 중심을 다지는 곳이 되어갔다.


그는 늘 메인 배역을 노래했고,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극장에서도 근무하거나 초청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렇게 10년,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11년째 시간을 맞고 있다. 한 곳에서 그렇게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안주한 것이 아니다. 경쟁을 버티고 신뢰를 쌓아왔다는 증거다.


“물론 다른 극장에서 계속 오퍼가 오기도 하는데… 저는 스타가 되거나 엄청난 성공을 기대하는 성악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을 중요시하고, 비스바덴이라는 도시의 환경이 마음에 쏙 들거든요. 이 도시는 휴양지이면서도 인종차별이 적고, 아이들 교육 환경도 좋아 가족이 함께 지내기에 아주 이상적입니다.”


그는 극장에 취직하기 전, 재학 중이던 한스 아이슬러 대학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어려운 시절 아내의 헌신이 큰 힘이 되었다. 그 아내 역시 비스바덴을 좋아하기에 고민하지 않았다. 또 다른 도시는 일정이 빠듯하고 경쟁이 치열했지만, 비스바덴은 조금 느긋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베를린 정도에서 오퍼가 왔다면 고민했겠죠. 하하.”


연기, 언어, 문화의 장벽을 넘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생계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건 문화와 언어의 적응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언어, 그리고 각 나라의 오페라 문화에 익숙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절망적인 순간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지만 매 순간이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러나 도망치기보다는 그때그때 맞서 부딪히며 하나씩 극복해나갔다.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로코 역으로 데뷔했을 때이다. 이 역은 노래뿐 아니라 대사량이 엄청난 역할이다. 바그너 작품처럼 음악 중심의 오페라에 많이 출연하다 보니 대사량이 많은 경우 독일어 대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게 무엇보다 큰 도전이다. 특히 독일인과 똑같이 노래하기 위해서는 발음, 억양, 제스처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했다. 그동안 무대에서 독일어 대사가 많은 작품이야 ‘마술피리’ 정도밖에 없었기에, 로코 역을 소화하는 데는 훨씬 많은 연습과 준비가 필요했다.


또 다른 도전은 연출 스타일의 변화였다. 이전 극장장 시절에는 전통적인 클래식 오페라가 중심이었지만, 지금의 비스바덴 극장장은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활동하던 드라마투르그(dramaturg 연극이나 오페라에서 작품의 기획, 분석, 해석, 구성 등을 담당) 출신으로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즉 연출 중심 오페라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것이다. 이전에는 지휘자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연출가가 주도권을 갖고 극장을 이끌어가는 분위기라는 말이다.


“이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연기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부족한 편이고, 저 역시 유학을 조기 졸업하고 현장에 바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연기적 감각을 따로 익히는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그런 이유로 독일 현장에서 연출자의 요청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제스처와 표정, 움직임을 표현하는 연습을 따로 해야 했습니다.”


박영두는 실제 무대 위에서의 ‘걸음걸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발레 수업을 따로 신청하기도 했다. 캐릭터마다 걷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기 위해 비스바덴의 발레단 단원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고, 그 과정을 통해 무대 위에서의 무게 중심, 분위기, 감정 전달 방법을 연구했다. 전통 발레가 아니라 현대무용까지 섞어가며 인물의 감정을 담은 움직임을 익히는 데 집중했다.


제스처와 표정은 영화 속 배우들, 예를 들어 말론 브란도나 알 파치노 같은 이들의 연기를 분석하며 배워나갔다. 박영두는 그들의 무게감 있는 표정,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하지만 모든 것을 표현하는 시선과 몸짓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고민하는 연기 하나도 턱을 괴는 방식, 눈썹의 움직임 하나까지 관찰하고 따라 하며 무대 위에서 자연스러움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 모든 것은 제가 어쨌든 ‘이방인’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노력의 연속이었습니다. 독일 무대 위에서, 유럽 관객들이 보기에 어색하지 않기 위해, 저 스스로 꾸준히 연구하고 연습하며 그 문화와 감각을 체화하려고 노력했죠. 그런 시간이 쌓여 지금은 연기 면에서 따로 지적받지 않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물론 독일 문화에 완벽히 적응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그는 한국인이고, 그의 안에 한국적 정서와 사고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독일식으로 많이 변해 있음을 스스로도 느낀다. 돌이켜보면 독일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많이 했던 것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기준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기준에 나를 맞추되, 내 안의 진정성과 예술적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독일에서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앞으로도 지켜갈 박영두만의 방식이 아닐까?


기억에 남는 무대, 그리고 세계와의 교감


2023년 5월, 독일 비스바덴 극장은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Anna Netrebko)의 복귀 무대가 이곳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한동안 무대에서 멀어졌던 그녀가 선택한 무대는 바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갈라 콘서트였고, 이는 곧 극장 안팎으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바리톤 젤리코 루치치(Zeljko Lucic)도 함께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고, 극장 측은 이 대형 무대의 ‘자카리아’ 역할에 박영두를 캐스팅했다. 나부코는 워낙 규모가 큰 작품이기에, 이런 중요한 무대에 박영두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그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공연이 확정되었을 때, 극장 밖에서는 네트렙코의 복귀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러시아 출신 예술인을 무대에 세울 수 없다’는 목소리, 그리고 비스바덴 극장 경영진의 판단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막이 오른 후, 모든 우려는 환호로 바뀌었다. 콘서트는 대성공이었고, 안나 네트렙코는 물론, 박영두 역시 자카리아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큰 호평을 받았다.


사실 공연 전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이 무게감 있는 무대에, 보다 유명한 세계적 베이스를 써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극장 측은 그래도 박영두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그렇게 1년 넘게 공들인 끝에, 그 무대는 박영두에게도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후, 변화가 찾아왔다. 예컨대 이번 시즌 뒤셀도르프를 비롯한 여러 극장에서 초청받았는데, 이는 네트렙코와 함께했던 그 공연 덕분이 아닐까 싶다. 같은 에이전시에 소속된 사무엘 윤처럼, 박영두 역시 주요 배역을 맡게 되었고, 안드레아 샤거 같은 세계적인 거장들과 함께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비스바덴에서의 그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영두에게 있어 ‘인정’의 순간이자,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었고, 이후 펼쳐질 무수한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신뢰받는 이름, 그리고 남은 시간들


그를 향한 극장의 평가는 명확하다. “박영두가 캐스팅 보드에 있으면 신뢰가 간다.” 비스바덴에서 무거운 역할만 하는 줄 알았던 그가, 최근엔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돈 바질리오처럼 재치 있는 캐릭터도 소화하며, 연기의 유연함도 인정받았다.


그는 말한다. “가수로서 연차가 쌓이면 월급도 오르고, 극장에선 부담이 되죠. 하지만 10년 넘게 버텨온 몇몇 동료들과 함께 서로 응원하며 살아남았어요.” 지금은 박 사무엘, 양호영 같은 젊은 한국인 솔리스트들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에게 그는 든든한 선배로서, 응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매일을 연습하고 연구하며 살아간다. 시간이 갈수록 노래는 더욱 깊어지고, 연기는 더욱 유연해진다. 한국 무대에서 그의 베이스가 울리는 날, 그것은 단지 한 명의 성악가의 귀환이 아니라, 한 시대를 견뎌낸 목소리의 울림이 될 것이다.


박영두는 독일에서 종신단원으로 활동하면서도 여전히 한국 무대에 서고 싶어 한다. 특히 아버지는 열렬한 오페라 애호가였기에 아들의 노래를 무대에서 듣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한때 대구오페라하우스에 프로필을 제출해 출연을 약속받았지만 여러 사정으로 공연 자체가 취소된 적이 있다. 이후 기회가 다시 왔지만, 이번에는 비스바덴에서의 시즌과 겹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언젠가 독창회든 오페라든 한국에서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쯤 다시 비스바덴으로 떠나있을 베이스 박영두에게 다음에 서울에 올 때는 꼭 음악회를 기획하기로 약속했기에 네트렙코와 함께 한 그의 멋진 노래를 기대해도 된다.


♣♣♣


베이스 박영두는 2014~2015시즌부터 비스바덴 오페라극장에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11시즌을 마치고 12시즌째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지요. 독일 슈타츠오퍼(주립 오페라극장)는 정단원 중에 15시즌을 마친 성악가를 선발해 주 의회 결의를 거쳐 종신단원으로 임명합니다. 성악가로서는 큰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베이스 박영두는 이제 11시즌을 마쳐 아직 종신단원에 이를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아마 인터뷰하신 기자께서 뭔가 오해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도 자식이 종신단원의 영예를 얻었으면 좋기는 하겠습니다만, 앞날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 기사에 토를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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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review.kr/26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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