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체코일기 2025.08.09 (토)

by 박인식

새로운 현장을 시작할 때마다 늘 막막합니다. 시작하고 끝맺지 못한 일이 없고, 해결하는 데 힘이 더 들고 덜 들고의 차이일 뿐 어느 문제나 결국은 해결해 냈지만, 이제는 나이도 들어 그런 일에 면역이 생길 법도 한데, 그래도 시작할 때는 늘 막막하지요. 요즘은 옛날과 달라 현장이라고 해서 먹고 사는 데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옛날에는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막막함을 더하는 골칫덩이였습니다.

국내 현장도 그런데 하물며 물설고 낯선,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현장은 또 어떻겠습니까. 계약을 위해서는 먼저 견적을 내야 하는데, 가보지도 않은 나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곳에서 사는 데 드는 비용을 무슨 수로 예상하겠습니까. 어림짐작으로 했다가 실제와 차이가 크게 나면 그것도 낭패이지요.


문득 오래전 생각이 났습니다. 사십 년도 훨씬 이전인 80년도 초에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똑같은 일을 했다고, 지금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만 그때는 지금 우리 같은 외국 기술자들에게 일을 배웠노라고 말씀드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정부에서 외국인 기술자들이 한국에서 사용하는 경비를 모두 한화로 지급하는 조건으로 외환 사용을 승인하겠다고 했습니다. 외화를 한 푼이라도 아껴보자는 것이었지요. 그때 외국인 기술자들이 묵을 숙소며 교통편을 마련하고, 경비를 한화로 지급하고 정산하는 일을 제가 했습니다. 당시 제가 연구실 막내여서 억지로 떠맡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 기술자문 계약을 제안하면서 상대 회사에서 현장 상주하는 데 필요한 모든 시설과 차량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견적을 제출했습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조건이었지요. 우리가 숙소며 사무실을 구하는 게 쉽지도 않고, 아무래도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거 구하느라 시간은 또 얼마나 걸리게요. 여러모로 낭비이지요. 저희 내부적으로는 견적을 내는 것 말고도 매번 자금을 신청하고, 송금해 주기를 기다리고, 비용 집행한 정산서류를 본사로 보내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픕니다. 거기에 자금이 조금 늦기라도 하면 남의 땅에서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다행히 상대 회사에서 그 조건을 선선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도착하는 날 공항에서 차를 받아 바로 숙소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일주일 고생은 덜었나 싶습니다.


저희 숙소를 마련해준 분은 회사에서 인사 노무를 담당하는 분이었습니다. 어쩐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도 40여 명이나 되는 외국인 기능공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기는 해도 저희가 생각한 것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모든 게 만족스러웠습니다.


사실 저희가 요구한 조건은 ‘furnished accomodation 1인 1실’이 전부였거든요. 아무리 계약 조건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일을 따내는 처지에서 시시콜콜 주문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상대가 그 조건을 어디까지 이해할 것인지 몹시 걱정스러웠습니다. 혹시 도착해서 이불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침대에서 자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침대 시트뿐 아니라 여분까지 준비해 놓고, 냉장고 안에는 일주일은 족히 견딜 만큼 식품을 채워 넣고, 게다가 무쇠 밥솥에 커피머신까지 준비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프라하에서 이곳까지 두 시간도 넘게 걸리는데 며칠씩 내려와서 핸드폰 개통에 은행 계좌 개설까지 다 마치고서야 홀가분하게 올라갔습니다. 오르내리는 내내 마음이 안 놓인다며 남편께서 운전해 함께 다니더군요.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료들도 상대 회사 담당자에게 작은 것이지만 선물을 건네고 함께 식사도 하고 그러는 걸 보니 이 현장은 왠지 크게 마음고생하지 않고 끝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KakaoTalk_20250810_050758467.jpg
KakaoTalk_20250810_050758467_01.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체코일기 2025.08.07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