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현장이나 처음 시작할 때는 늘 막막합니다. 경험으로 이야기하자면 누구 못지않지만, 그렇다고 현장을 시작할 때 걱정이 덜어지는 건 아닙니다. 다행히 이번엔 걱정이 예전보다는 덜합니다. 아마 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시간 이 기회 자체를 선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자세를 갖춘 후배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도 큰 까닭 중 하나일 겁니다. 빌런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압니다. 뭐라고 댓글이 달릴지. 그거 짐작 못할 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은 아니거든요. “빌런이 안 보이면 네가 빌런이다.” 그 말씀을 하고 싶으시겠지요. “노름판에서 호구가 안 보이면 네가 호구라더라”는 격언의 변형쯤 되는 그 말 말이지요.
오늘은 매우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출근해서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오늘은 매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 하나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물론 후배들까지 그렇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일하는 중에도 살짝 부담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희 조가 식사 당번이었는데요, 처음으로 라면을 끓이기로 한 겁니다.
현장에 도착하고 한 달 가까이 되는 오늘까지 저녁은 늘 한식을 먹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지요. 여섯 식구가 각자 챙겨 온 것도 만만치 않고 중간에 한 번 한국식품점에 다녀오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타국인데, 한 달을 한식만 먹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동안 저희 조는 미역국하고 카레를 준비했습니다. 사우어크라우트로 김치찌개도 한 번 끓였네요. 사우어크라우트는 마늘하고 고춧가루만 빠진 김치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만드는 과정이 비슷합니다. 생각보다는 별로이긴 했습니다. 그래도 미역국하고 카레는 정말 맛있었지요. 영화 벤허를 만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보고 “오 하나님, 내가 저 영화를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랬다지 않습니까. 저희가 꼭 그랬거든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물론 유튜브의 지원을 받기는 했습니다만.
그런데 몇 번 하고 나니 그만 밑천이 떨어진 겁니다. 그러다 문득 라면 가지고 할 게 없나 싶었습니다. 부랴부랴 유튜브를 뒤져서 반신반의하면서 끓였는데 말이지요. 세상에. 불맛 나는 짬뽕 라면이 탄생한 겁니다.
사실 신기한 건 아닙니다. 파기름 내서 돼지고기 볶고 거기에 양파, 버섯 넣고, 비장의 꼼수인 치킨스톡도 몇 개. 본 건 있어 가지고 볶는 도중에 양념간장을 휘휘 둘러 불맛을 내고 말입니다. 들인 시간은 또 얼마인지요. 그렇게 하고도 맛이 없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따라 식구가 많았습니다. 출장자 두 명까지 모두 여덟이었거든요. 출장 올 때 작지 않은 트렁크 하나에 가득 먹을 것을 싸 들고 왔는데, 적어도 밥은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커다란 국솥 두 개 가득 끓이고 게다가 이천 쌀로 지은 밥까지. 국물이라도 좀 남을까 했더니. 설거지할 게 없을 정도였습니다. 맛있기도 했지만 그런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어준 후배들이 있어서 든든하고 고마웠습니다. 어쩌면 희망 사항일지 모르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머리 허연 노인네가 선배랍시고 준비해 준 걸 맛없다고 할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튼 제겐 기가 막힌 요리였습니다. 집에 가서 다시 한번 도전해 볼 만 하겠습니다. 보세요, 밑바닥이 보이는 국솥이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