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체코일기 2025.09.03 (수)

by 박인식

오늘 비로소 한 달이 지났습니다. 8월 월간보고서를 제출했거든요. 하는 일 없이 바빴다고 생각했는데, 보고서 쓰다 보니 그래도 한 일이 꽤 됩니다. 밥값은 했나 봅니다. 처음 쓰는 월간보고서이어서 틀 잡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다음 달부터는 이 틀을 따라가면서 조금씩 변주해 나가면 될 것이니 아무래도 이번보다는 쉬워지지 않을까 합니다.


저녁 식탁에 무려 열 명이 둘러앉았습니다. 우리 여섯, 관계사 둘, 출장자 둘. 꽤 넓은 식탁을 그득하니 채웠군요. 우리 식구 말고 네 분은 모두 호텔에서 묵는 데다가 이곳엔 한식당이 있을 리 만무하니 식사할 때마다 우리 음식 생각이 간절하지 않았겠습니까. 저희야 하는 김에 양을 좀 더 늘려 잡으면 될 일이고.


사람 사이 관계를 편안하게 만드는 데는 식사만 한 게 없습니다. 식사하면서 한 잔이 빠질 수 없지요. 이곳이 맥주의 나라 아닙니까. 필스너와 코젤의 고향. 하지만 그건 갖다 댈 것도 아닌 맥주가 수두룩합니다. 저는 그중에 Starobrno 11을 아주 좋아합니다.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체코 제2의 도시인 브르노가 있습니다. 이 맥주 이름이 스타레브루노인데요, 옛날 브루노라는 뜻이랍니다. 이 동네에서 만든 대표 맥주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점심때 꼭 한 잔씩 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이곳에서는 식사 주문할 때 꼭 마실 것을 물어본다는. 안 물어봤으면 안 시켰을 텐데. 그러니 맥주를 마시게 된 것은 제 의지와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스테레브루노는 흑맥주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라거가 주종입니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그런 맥주이지요. 사실 저는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운 날 찬물에 씻고 나와서 시원하게 한잔하는 건 몰라도 일부러 찾아 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곳 맥주는 웬일인지 자꾸 손이 갑니다.


며칠 전에 새롭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지낼 때 화장실 가는 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심심치 않게 약을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지 한 달이 넘도록 약 없이도 아무 불편을 느끼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니 달라진 거라고는 맥주 마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서울 돌아가서 맥주를 계속 마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시면서 맛있다는 생각이 든 맥주는 솔직히 이곳 맥주가 처음입니다.


출장자들이 내일이면 돌아간다고 모두 한잔하러 나갔습니다. 맛있는 맥주를 생각하면 따라 나가고 싶기는 한데, 제게 어울리는 자리도 아니고 게다가 밥 먹고 나니 슬며시 졸리기도 하고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휘휘 몰아내고 혼자 느긋하게 설거지를 마쳤습니다.


한 달 소회를 쓴다는 게 맥주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책 잠깐 읽고 오늘은 일찍 자야 할 모양입니다. 눈이 막 감기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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