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체코일기 2025.09.13 (토)

by 박인식

오늘 늦잠을 잤습니다. 주말이 따로 없이 일하다 보니 늘 긴장한 상태로 지내기도 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좀 일찍 일어나야 해서 여섯 시간을 넘겨 자본 일이 없습니다. 오늘은 팀원 한 분이 생일을 맞은 데다가 고단하기도 해서 이래저래 한 시간 늦게 출근하기로 했습니다.


엊저녁에 미역국을 끓여놓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른 팀원이 이미 밥을 안쳤네요. 나이가 들면 이름 붙은 날이 오히려 귀찮기는 합니다만, 그건 제 이야기일 것이고.


오늘 생일 맞은 분은 평생 시추를 해오던 분입니다. 지질조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시추조사입니다. 76밀리미터 구경으로 땅을 뚫어 암석을 꺼내서 지반 상태를 평가하는 작업이지요. 깊게는 백 미터 넘게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시추공에서 여러 시험을 하기도 합니다. 전체 조사비의 2/3 정도를 투입하기도 하고 모든 시험의 출발점이 되는 게 바로 이 시추조사인데, 그 중요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어 매번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런 경향은 이곳이라고 다르지 않네요.


그게 저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기능공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없으면 아예 출발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인데도 말입니다. 저희는 그런 분들을 지휘하는 처지이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그게 그분들을 부하 직원 대하듯 대할 이유가 되지는 않지요.


저 역시 평생 이 일을 해왔고 경험으로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시추조사는 지켜봤을 뿐 제가 당사자가 되어 한 게 아니라서 세세한 부분까지 알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현장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걱정스러운 게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업을 준비할 때 후배들을 찾아가 오래된 기억을 짜맞추다가 문득 이분들과 함께 가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장 일 시작하고 벌써 한 달 보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여러 결정을 내렸지만, 그중 으뜸이 바로 오랜 경험을 가진 기능공이 합류한 게 아닐까 합니다. 두 분이 번갈아 현장을 지키고 있는데, 그 두 분이 형제입니다. 형님은 82년에 처음 이 일을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제가 일하던 현장이었습니다. 채 서른도 되기 전 일입니다. 이분은 이십을 갓 넘겼을 때였고. 워낙 오래전 일이라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여기는 우리만큼 산업기반시설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그에 필요한 지질조사도 경험이 상당히 부족한 편입니다. 기능공도 다르지 않지요. 오늘 생일 맞은 그분이 바로 그런 곳에서 아주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언어소통이요? 어차피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도 영어를 못하고, 더구나 슬로바키아 사람들이라 체코 사람들과 말도 다릅니다. 그래도 말이 안 통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모바일 통역 앱이 있어서 말이지요. 이미 가까운 동료가 되었습니다.


이 사업 시작하고 상당히 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도 있고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도 적지 않습니다. 다행히 그 결정이 문제가 된 일은 아직 없습니다. 심사숙고한 결정이야 그렇다 쳐도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도 마치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해서 내린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참 운이 좋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게 오랜 경력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암묵지가 누적되어 온 결과라는 것이지요. 딱히 이거다 하고 내놓을 건 아니더라도. 하긴 운전할 때 자기가 어디서 브레이크를 밟고 어디서 가속 페달을 밟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지요.


화양연화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장만옥이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꽃 같은 시절’이라는 뜻으로도 널리 쓰입니다. 요즘은 이를 ‘리즈 시절’이라고도 하더군요. 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젊었을 때를 일컫는 말인 줄 알았는데, 프리미어 리그에서 유래한 말이라는군요. 아무튼 저는 지금이 제 화양연화가 아닌가 합니다. 제가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경험을 더할 나위 없이 알뜰하게 써먹고 있으니 말입니다.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나 즉흥적인 결정이나 크게 어긋나는 것 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어쩌다 보니 미역국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군요. 그런데 이 이야기의 결론은 허망하기까지 합니다. 오늘이 생일이 아니었다네요. 기껏 미역국 다 먹고 나서 말입니다. 환갑 지난 사람들 생일이 진짜 자기 생일인 경우가 드물기는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그저 웃고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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