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현장에서 일하기는 하는데 정작 현장에는 나가보지 못하고 사무실에 붙들려 지냅니다. 서류 작업이라는 게 일 잘하자고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이건 일하기 위해 서류 만드는 게 아니라 서류 만들자고 일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워낙 원전 사업이라는 게 그렇기는 합니다. 원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사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건설합니다. 규정에 어긋난 건 세상없어도 안 됩니다.
그건 규정해 놓은 조건에서는 맞는 일입니다만, 세상에 완벽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조건을 다 규정해 놓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는 원칙으로 돌아가 어느 게 가장 원칙에 부합하는지 판단합니다.
그런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깁니다. 우리는 결정을 내리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적절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자문하는 게 우리 일이지요. 그런데도 우리 의견을 최종 판단으로 여기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물론 이곳 업체가 이렇게 복잡하고 규모가 큰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 우리 의견을 최종 판단으로 받아들이는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발주처와 규제기관의 몫인 건 분명합니다.
오늘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규정해 놓지 않은 영역의 일이 또 일어난 겁니다. 동료가 의견서를 하나 작성해 검토해달라고 들고 왔습니다. 제 생각을 설명하고 나서 이런 일에 대한 내 나름의 대처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사실과 판단을 섞지 마라. 가능하면 한 문서 안에서 사실과 판단을 섞어 서술하는 일을 피해라. 어쩔 수 없이 한 문서 안에서 사실과 판단을 섞어야 한다면 (읽는 사람이 혼동하지 않도록) 반드시 문단을 나눠서 서술하도록 해라. 어떤 경우에도 한 문단 안에, 더욱 한 문장 안에 사실과 판단을 섞어서 서술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잔소리 하나를 덧붙였습니다. 예민한 문제일수록 ‘나’를 주어로 삼아서 이야기하라고 말입니다. “네가 틀렸어”가 아니라 “나는 네가 틀렸다고 생각해”라고 말이지요. 사실 그게 더 정확한 말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 그러면 안 돼” 보다는 “네가 그래서 내가 몹시 섭섭해”, “이렇게 해” 보다는 “나는 네가 이러면 좋겠어”
여러분, 혹시 제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는 당신이 이제 그만 떠들었으면 좋겠어” 뭐 이렇게 말이지요. 그게 “조용히 해” 보다는 낫기는 한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