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5.09.18 (목)

by 박인식

예전에는 해외에 나가 있으면 한국 방송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인터넷으로 파일을 받아 볼 수가 있기는 한데, 한 시간짜리 방송을 보자면 밤새 받아야 했습니다. 이젠 넷플릭스도 있고 유튜브로 입맛에 맞게 편집된 걸 골라 볼 수도 있지요.


요즘 <은중과 상연>이라는 드라마가 화제라면서요? 저는 안락사를 다룬 예고편에 눈길이 가더군요. 한동안 안락사에 관심 가졌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관심이 갈 나이이지 않습니까. 오래전에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의향서를 등록하기도 했지요. 그렇기는 해도 시간이 아까워 진득하게 앉아서 보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드라마를 안 보는 건 아닙니다. 한번 꽂히면 아주 몰입해서 봅니다. 인상적인 장면은 몇 번씩이나 다시 보지요. 더구나 요즘은 알고리즘 때문에 그런 장면이 눈에 더 띄기도 하지 않습니까. 눈에 띄어서도 보지만 일부러 찾아볼 때도 많습니다. 오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새삼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나의 아저씨>를 인생 드라마로 여기는 남자들이 많다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다 끝나고 더 이상 화제가 되지 않을 때쯤 맛 들여서 한 번에 몰아보고, 그 후로 지금까지 많게는 수십 번 본 장면도 여럿 있습니다. 정희(오나라)가 출가한 상원(박해준)을 찾아가 절규하는 장면, 동훈(이선균)이 상훈(박호산)과 기훈(송새벽)이 모욕당하는 모습을 어머니(고두심)가 보고 가슴 아파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분해 자기 형제를 모욕한 이를 찾아가 그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과격하게 몰아세우는 장면, 지안(아이유)이 인사위원회에서 자기를 인격으로 대해준 동훈과 회사가 잘 되기를 바란다며 당당히 자기 생각을 밝히는 장면.


<미스터 선샤인>도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유진 초이(이병헌)가 자기를 구해준 의병대장 황은산(김갑수)을 찾아가 딴청을 하는 그를 향해 깊이 머리를 숙이며 감사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 깊습니다. <연애 시대>의 말도 안 되는, 그러나 가장 공감이 갔던 결론 부분, 동진(감우성)이 은호(손예진)를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이야기하다가 문득 내가 인상 깊게 본 장면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음 깊이 담아두었던 것을 드러내는 장면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던 이가 한마디 말도 없이 출가해 스님이 된 이후 지낸 인고의 세월 끝에 터져 나온 절규, 어떤 모욕도 견뎌내던 이가 형제와 어머니가 겪은 모욕을 참지 못해 터트리는 분노. 이렇게 보면 분노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마음을 다해 감사하는 모습이나,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랑의 실체를 비로소 깨닫고 자신을 둘러싼 도리와 상식을 벗어던지는 모습은 그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감정을 감추는 게 미덕인 세월을 살았습니다. 요즘 사람들과 가장 다른 점이 그게 아닐까 합니다. 생각을 담아두기보다는 표현하는 게 자연스러운 세대, 하고 싶은 건 하고야 마는 세대와 달리 도리와 경우와 상식을 벗어나는 걸 무례하고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일로 여기고 살았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살았으니 거침없이 자기 생각을 밝히고 누가 뭐라든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는 이들이 낯설어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을 보니 지난 세월이 억울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다르다는 겁니다. 더도 덜도 아니고. 세월 거스를 장사 없으니 세월에 맞춰 살아야지요. 간혹 그렇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살 것 같지는 않네요. 다만, 이제부터는 마음에 담아둔 것 조금씩 열어놓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기는 합니다.


제가 가장 즐겨 인용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라고, 논어에 실린 공자의 말씀입니다. 칠십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더라는 거지요. 이젠 칠십을 넘겼으니 한번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볼까요? 그래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지.


아마, 그렇게 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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