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체코일기 2025.10.16 (목)

by 박인식

혜인 아범이 초등학교 다닐 때쯤이었을 겁니다. 밤늦게 잠실 어느 네거리에선가 시추조사를 하다가 지름 1미터도 넘는 대형 상수도관을 뚫는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상수도관에서 쏟아져나온 물 때문에 차가 다니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지요. 혹시 따라가지 않겠냐고 하니 선선히 따라나서더군요. 일은 새벽녘이나 되어 끝이 났습니다. 지금도 그곳을 지나면 그 생각이 납니다. 자식과 함께한 현장, 제겐 오래도록 기억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아범보다 훨씬 커진 혜인이가 오늘 제가 일하는 현장을 찾았습니다. 제 발로 온 건 아니고, 제가 데려왔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제게는 또다시 기억할만한 감개무량한 사건이었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내심 제가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지요. 혜인이에게는 별로 재미없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자식에게 자기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쉬워도 손녀에게 그러기는 쉽지 않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제 나이가 되도록 일해야 하는데.


그걸 보는 혜인이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혜인이에게는 할아버지 일하는 모습이 그다지 신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한국에 오면 늘 교회에서 바쁘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바깥사돈께서는 올해 목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아쉽게도 제겐 그럴 일이 없었고.

아이에게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싶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건 희망 사항으로 그칠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범에게 오래전 밤새 사고 수습하는 현장에 갔던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니 전혀 아니라네요. 혜인이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그래도 전 좋았습니다. 제게는 끝끝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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