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Book Review

혐오의 과학

by 박인식

매슈 윌리엄스

노태복

반니

2022년 4월 5일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조금씩 나아져 간다고 믿는다. 물질적으로는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으며,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역시 소란스럽기는 해도 조금씩 맑아져 가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실상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세상이 맑아지기는커녕 범죄가 저렇게 늘어가는 게 보이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릴 만하다.


그래도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상대적 빈곤은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생활 수준조차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고, 범죄의 절대 수치가 늘어나는 건 옛날에는 죄라는 인식조차 없었던 행동이 지금은 죄가 되는 일이 많아졌고, 그건 그만큼 세상이 엄격해졌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두드러지게 퇴보한 것이 있으니, 바로 타인에 대한 혐오이다. 이건 어떻게 세월이 지나도 나아지지는 않고 악화 일로를 걷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평생 살고 있는데, 사랑을 내세우는 대표적인 종교인 기독교가 근래에 와서는 타인에 대한 혐오를 부르짖고 나설 정도로 퇴보하는 모습을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차별금지법 반대 때문이다.


혐오에 관한 책에 관심을 둔 지는 꽤 오래되었다. 동성애, 이슬람, 장애, 이주민을 향한 혐오를 다룬 책도 많았고, 이들에 대한 차별, 그리고 편견과 편향을 다룬 책도 적지 않았다. <혐오의 과학>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그동안 읽으면서 가졌던 궁금증을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그동안 읽은 책은 대체로 원인보다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했던 대로 혐오를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책이고,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혐오의 원인이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성과는 미주 30쪽을 포함해 400쪽이 넘는 책을 따라가며 이해하기엔 내 지식이 너무 모자라고, 그걸 따라잡기 위해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기엔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데 그쳤다. 그래서 대부분 건성으로 읽기만 했다. 그렇다고 건진 게 아주 없지는 않다.


편도체는 위협이나 공포, 분노와 같은 부정적 정서를 감지하고 반응을 조절하는, 생존과 직결된 위험 감지 시스템이라고 알려져 있다. 새로운 자극에 대해 즉각적인 정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의식적 사고를 하기 전에 자동적 반응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인종이나 사회집단의 얼굴을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편도체 활성이 증가한다. 이것이 실제로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고 낯선 것이나 위협 가능성에 대해 자동으로 경계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반응이 늘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이런 자동 감정 반응은 대체로 전두엽 같은 인지 조절 영역에서 통제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편견이 드러나거나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전두엽이 충분히 통제되지 않기 때문인 셈이다.


저자는 자동 반응에 따른 이런 부정적 감정을 전두엽이 충분히 통제하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학습이 지식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 개념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인격 수양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학습한다고 해도 통제가 늘 가능한 건 아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인격을 수양하는 거에 그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이 외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다음 몇 단계를 거친다.


1) 외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농담이나 노골적 비방과 같은 ‘혐오 발언, 혐오 표현’은 2) 내집단(우리)과 외집단(그들)을 분리하고 외집단의 공간을 내집단이 ‘회피’하는 현상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이러한 회피 현상이 대중교통이나 주택공급 관련 정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3) 이후 외집단을 따돌림하고, 거부하고, 억압하는 ‘차별’을 거쳐 4) ‘물리적 공격’으로 확대되며 5) 종국에는 홀로코스트 같은 ‘절멸’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반동성애 운동은 ‘혐오 표현-회피-차별-물리적 공격-절멸’로 이어지는 ‘혐오 피라미드’ 중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 혐오 표현이나 회피에 머물러 있던 게 차별금지법 파동으로 오히려 차별을 넘어 물리적 공격 단계에 가까워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저자는 외집단에 대한 부정적 사고가 대단히 해로운 행동으로 변할 수 있는 때가 사춘기라고 지적한다. 이때부터 편견과 혐오가 들어설 수 있다는 말이다. 큰 손녀가 바로 그런 나이인데, 그래서 편견과 혐오가 자리 잡지 않도록 아이에게 설명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조심스러워 아직 아들 내외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가의 신앙 배경을 생각하면 걱정스럽고, 아이들이 사는 독일은 그런 걱정이 덜한 곳이어서 마음이 놓이고 그렇다.


혐오 피라미드 중 ‘차별’이 ‘물리적 공격’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분노하는 개인은 종종 그 분노를 외집단에 표출한다. 분노의 원인이 외집단 때문이라고 잘못 여겨서다. 내가 실직자가 된 건 그들이 일자리를 다 차지했기 때문이며, 내가 안전하지 못한 건 그들이 전부 테러범이기 때문이고, 내가 가난한 건 그들이 복지 혜택을 독차지하기 때문이고, 우리가 아픈 까닭은 그들이 의료 서비스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기 때문이고, 우리가 고립된 까닭은 그들이 우리 동네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고, 우리한테 기회가 적은 건 그들이 우선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모습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갈등 상당 부분에 이 때문이 아닐까.


저자는 혐오자를 사명감 혐오자, 보복성 혐오자, 방어적 혐오자로 나눈다.


“‘사명감 혐오자’는 심각성과 위험성 면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다. 도덕적인 동기에서 행동하는 이들은 자신이 어떤 사명을 띠고 있다고 여긴다. 널리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고 외집단에 교훈을 가르치고 외집단을 복종시키는데, 만약 그게 실패하면 박멸시켜야 한다. ‘보복성 혐오자’는 앙갚음을 위한 폭력에 관여하는 자들이다. 복수는 가해자와 관련한 집단의 (가해와 무관한) 결백한 구성원에게 행해질 때가 많다. 이런 혐오 범죄는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 공격에 대한 반응으로 크게 일어났다. 결백한 무슬림에 대한 혐오 범죄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방어적 혐오자’는 높은 편견과 혐오 사이의 중간에 해당한다. 방어적 범죄는 외집단이 내집단의 상당한 영역 안으로 들어올 때 벌어지며, 그 침입이 재산 가치를 떨어뜨리고 아이들을 타락시키며 범죄를 유발한다고 생각한다.”


코미디는 사회 현상을 희화화해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니 그 대상을 너무 엄격하게 제한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있다. 관객이 그 정도 판단력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는 저자의 말은 매우 놀랍고, 그래서 내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심리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성차별주의, 반무슬림, 반동성애 농담을 들으면 여성, 무슬림,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인정하는 정도가 커졌다. 심리학자들이 도달한 결론은 코미디가 피실험자들을 편견에 젖게 하는 게 아니라 웃음거리로 인해 그들이 이전부터 지녔던 편견적인 태도를 억눌려야 하는 상태로부터 일시적으로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편견이 없는 사람인 듯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때문에 일상적으로 억눌려왔다.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 혐오 농담이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편견의 분출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혐오와 이로 인한 공격성은 본질적으로 집단 현상이며, 집단에 대한 위협은 개인에 대한 위협보다 반응을 더 크게 일으킨다는 저자의 지적은 섬뜩하다. 조직력과 헌신에 관해서는 어느 집단에 뒤지지 않는 교회가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혐오를 신경과학적 분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제대로 읽지 못했고, 저자가 역점을 둔 내용이 아닌 변죽만 살펴본 셈이 되었다. 신경과학에 관심이 있거나 이해가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중간쯤에서 덮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끝까지 읽은 내게 상을 줄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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