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체코일기 2025.11.08 (토)

by 박인식

아침에 출근하는데 사무실 앞 나무들 이파리가 얼마 남지 않았더군요. 이곳은 촌 동네라서 공기가 엄청 맑습니다. 홍은동 백련산 자락에 있는 우리 집도 공기가 꽤 맑은 편인데, 현장 사무실이 있는 두코바니도 그렇고 숙소가 있는 트르제비치도 늘 상쾌합니다. 몹시 무더운 날 첫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단풍이 들고 이젠 이파리도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이 되었네요.


그러고 보니 벌써 백일이군요. 영아 사망률이 높던 옛날에는 아이가 태어나 백일을 넘기면 이제 살았다 싶어서 백일 잔치를 벌이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백일을 살아남았으니 계획했던 일 잘 마치고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이 첫손에 꼽을 만합니다. 오래전에 사우디 부임할 때만 해도 문화가 다르기는 해도, 그래서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지는 몰라도, 그게 그렇게 큰 갈등을 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 이곳에 오면서 그때 얻은 교훈을 떠올렸지요. 사우디만큼은 아니어도,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매우 온순하고 점잖기는 해도,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은 피할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 이곳 사람들은 휴가에 진심입니다. 휴가를 미룬다던가 취소하는 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회사에 아무리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어도 예외가 없습니다. 대형 계약을 앞두고 실사받는 자리에 사업책임자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고, 현장 착수하는 자리에 현장책임자가 가족 행사를 이유로 빠졌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옛날 사람이라고 흉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변했다고. 제가 오래 한국을 떠나 있었으니 모를 수도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지금 우리 회사 분위기라면 말 나오기 전에 당사자가 알아서 일정을 조정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현장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 시작하고 석 달 넘도록 아직도 계획한 공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우리나라 현장에서도 주말에는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토요일은 사전 승인을 얻으면 가능하지만, 일요일은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이곳 작업팀들은 휴일이 모두 제각각입니다. 주말 3일을 쉬는 팀, 한 주 일하고 한 주 쉬는 팀, 장비는 그대로 돌리면서 한 주마다 작업조가 바뀌는 팀. 이미 작업환경이 상당히 개선된 한국에서도 꿈꾸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이번 연말에는 두 주를 쉰다는군요. 늦어진 공정 때문에 연말 휴무일을 좀 줄여야 하는 게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회사로서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더군요. 연휴 수당이 엄청난가 봅니다.


하긴 한국 분이 운영하는 한인 식품점도 일찍 문 닫고 주말에는 아예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 식품점을 이용하는 한인들은 대체로 저녁때나 주말 밖에 시간이 나지를 않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곳 사람들을 고용하니 그럴 수는 있겠는데, 저 같으면 주말에 자기라도 문을 열면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긴 그런 걸 용인할 분위기가 아닐는지도 모르지요.


지난 2월 중순 경주 현장에서 올라와 본사 준비팀에 합류한 이래로 처음 밀린 일이 없는 상태로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백일이 되니 여유가 좀 생기는군요. 지금쯤 휴가를 다녀오리라 생각했는데, 연말이나 되어야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석 달 넘게 머리를 못 깎다 보니 지금도 머리가 치렁치렁합니다. 어쩌면 휴가 갈 땐 꽁지머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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