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체코일기 2025.11.20 (목)

by 박인식

서구인 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젊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저는 고등학생일 때 모두 군인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노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서구인들은 열 살은 젊어 보인다고 합니다. 외국인들과 일하면서 저보다 한참 위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저보다 한참 아래였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이곳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경험이 많다는 건 알아도 지금 회사에만 사십 년 넘게 근무했다면 반신반의하는 눈치입니다. 한번은 이쪽 업계에서는 아주 원로라고 하는 이를 만났는데, 그도 저보다 아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주 강적을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들이 모두 젊습니다. 현장 책임자가 아들보다 한참 아래일 정도이지요. 하긴 저와 함께 일하는 우리 회사 선임 부장이 제 아들과 동갑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꽤 나이 들어 보이는 이가 현장에서 일하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일은 자꾸 늦어지고, 경험 있는 사람은 없고 하니 은퇴한 이들을 다시 고용한 것 같았습니다. 저와는 직접 대면할 일이 별로 없으니 그저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어제오늘, 그가 작성한 조사 결과를 함께 검토해 시험 구간을 선정해야 했습니다. 젊은 책임자가 나서서 설명하는데, 직접 작성한 이에게 설명을 듣는 게 낫겠다 싶었지요. 경험도 만만치 않아 보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이가 꽤 들어 보였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내공도 만만치 않게 느껴졌지요.


오늘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데 경험해본 사람끼리 통하는 게 있어서였는지 수월하게 검토를 끝내고 시험 구간 선정도 마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자기가 일흔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딱히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머리가 허연 제게 동질감을 느껴서였을까요? 깜짝 놀랐지요. 그래서 몇 년 생이냐고 물으니 55년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저는 그저 많아야 예순을 넘었겠거니 했거든요. 여기 사람들이 실제보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다음에 제가 뭘 물어봤을까요? 당연하지요. 생일이 몇 월이냐고 묻는 겁니다. 아, 8월이랍니다. 그래서 어깨를 두드리며 그랬지요. “내가 형님일세, 난 4월이거든.” 그러고는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줬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자기 가방을 가져오더니 신분증을 보여주질 않겠습니까. 저는 여태 자기 아니 이야기하면서 신분증 꺼내 보여주는 유럽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주변에 있던 이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둘이 신분증 꺼내놓고 나란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내세울 거라고는 나이밖에 없는 제가 갑자기 형님을 모셔야 할 뻔하지를 않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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