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봄에 지금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전신인 자원개발연구소에 들어가 월성 원전 지질조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지질조사가 그런 규모와 그런 내용으로 이루어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조사가 필요할 만한 대형 사업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1982년 말, 지금 회사에 입사하고 바로 거제도 지하 유류비축기지 건설 현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다음 해인가 원전 지질조사를 해야 한다며 본사에서 복귀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원전 지질조사를 할 만한 민간 기업이 없어 일단 국책연구소에서 시작하고 상황이 되는 대로 민간 기업으로 넘길 계획이었거든요. 입사 이래 영광 원전을 시작으로 울진, 월성, 고리에 이어 월성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까지 30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9년 초에 사우디 현지법인으로 발령받았습니다.
거기서도 원전 사업에 참여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한국-사우디 합작으로 스마트 원전 설계를 시작했을 때 사우디 관련 부처의 요청을 받아 부지선정 보고서 작성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일을 거의 마쳐 갈 때까지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을 부탁했던 원자력 국장이 실권을 잃으면서 용역비 청구도 해보지 못한 채 물러섰습니다. 몇 년 공들여 원전 조사를 수행할 컨소시엄까지 꾸려놨지만, 오는 날까지 헛물만 켜야 했습니다.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진전을 하나도 이루어내지 못한 채 2021년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었으니 그것으로 커리어는 끝난 걸로 생각했지만,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오늘까지 같은 일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45년 전에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이런 일을 할 만큼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외국 기술자문사와 계약을 맺어 그들에게 지도받으며 일을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저희가 그런 기술자문사가 되어 과거에 우리가 배웠던 것을 이들에게 하나씩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계에서 50년 가까이 쉼 없이 원전을 건설해온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1984년 영광 3, 4호기를 시작으로 원전 지질조사를 지금까지 수행해온 회사 또한 우리밖에 없습니다. 원전 조사를 수행하는 회사가 어디 우리 하나였겠습니까만, 있던 회사가 사라지고 없던 회사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40년 넘게 꾸준하게 한 길을 걸어온 회사는 우리뿐입니다. 그리고 그게 모두 제 경력이고 제 역사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일을 추진해 오면서 적지 않은 질문을 받았는데, 다행히 모두 아는 것만 물어보더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알고 제가 아는 것만 물어봤겠습니까. 제가 그만큼 많이 겪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 저에게도 당황하다 못해 과연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일이 지난 며칠간 일어났습니다. 문제라는 건 늘 상상을 뛰어넘게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잘못될 것이 없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삐걱거리고 그중 적지 않은 일이 틀어지기도 했습니다. 모두 저만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동안 겪어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우는 겪어보지도 짐작하지도 못했던 일”이라고 실토할 정도였습니다.
그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현장시험 하나를 오늘 끝냈습니다. 현장이 평지이기는 한데 이어지는 눈과 비로 땅은 온통 뻘밭이 되었습니다. 걷기도 힘든 곳에서 몇 날 며칠을 고생하는 팀원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기보다는 이러다 손드는 거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설 정도였지요. 식사라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얼른 돌아가서 씻고 편히 쉬는 게 먼저일 거 같아서 그저 등 두드려 주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문득 제가 너무 교만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묵상하며 이들의 수고가 허사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사 기도했습니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기도였는데, 급하긴 급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모두가 짐작 너머에 있는 상황까지 겪었으니 이제 더 어떤 문제가 가로막을 수 있을까 싶네요. 동료들이 힘을 잃지 말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