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는 무엇보다 안전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기초지반에 관한 한 현존하는 구조물 중 가장 엄격하게 안전성을 평가하지요. 그 과정 중 하나로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진동에 대해 구조물과 그 기초가 서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평가하는데, 이를 흙-구조물 상호 반응(SSI, Soil-Structure Interaction) 분석이라고 합니다.
이 분석에 필요한 시험 중 하나를 로마에 있는 실험실에 의뢰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할 수 있는 실험실도 얼마 없고, 그나마 있는 실험실도 모두 시험이 밀려있어서 로마까지 가게 된 것이지요. 작년부터 실험실을 구하려고 체코는 물론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폴란드, 거기에 노르웨이까지 뒤져서 겨우 하나 건진 겁니다.
이 시험은 현장에서 채취한 흙과 암석을 사용하는데, 이중 흙은 국가 간 이동할 때 검역 대상입니다. 그래서 항공편으로 운반하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열여섯 시간이나 걸려서 차를 몰고 로마까지 가게 된 까닭이지요. 도로로 국경을 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거든요.
프라하에서 서울을 가도 그 시간이 안 걸립니다. 비행기 안에서는 왔다 갔다 할 수나 있지요. 물론 휴게소에 들르면 되지만, 새벽같이 떠나도 자정 안에 도착하기 어려우니 그럴 여유도 없었습니다. 좁은 차 안에서 꼼짝 못 하고 열여섯 시간을 견딘다는 건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고단한 일이더군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혓바늘이 다 돋았어요.
아침에 실험실에 시료를 잘 전달하고 회의도 잘 마쳤습니다. 시험비는 얼마 되지 않는데 저희가 요구하는 건 꽤 까다로워서 짜증 날 법도 한데, 매사에 협조적이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볼 일은 잘 마쳤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오후 시간은 관광을 하겠다는데, 저는 내일을 위해 좀 쉬어야겠습니다. 갈 때 몇 시간은 제가 운전해야 할 테니 말이에요. 어제도 절반 정도는 운전할 생각이었는데, 세 시간 넘기니 안 되겠더군요. 미안한 일이지요. 물론 저는 안 해도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 먼 거리를 혼자 운전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제는 반에 반이나 했을라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내일 오전은 제가 운전하겠다고 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떠나자는데, 그러면 점심때까지 예닐곱 시간. 만만치 않은 일이지요.
저녁 서둘러 먹고 책이나 좀 읽다가 자야겠습니다. 에드워드 리의 <버터밀크 그래피티>가 읽을만하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재미없으면 부추긴 몇 분은 싫은 소리 좀 들으셔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