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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Nov 01. 2020

[사우디 이야기 10] 도로

사우디 이야기 (10)

항만설계 입찰 준비를 위해 홍해 북쪽 끝에 있는 두바 항을 돌아보고 나와 다음 행선지인 얀부로 내려가는데 이정표가 눈길을 끌었다. 지잔 1,513km. 우리나라에서는 400km 넘는 이정표도 보기 힘든데. 사우디 땅이 넓은 줄은 알았어도 이렇게 큰 줄은 몰랐다. 당시 리야드에서 두바까지 서북쪽으로 1,500km, 두바에서 남쪽으로 얀부, 제다를 거쳐 지잔까지 1,500km, 지잔에서 리야드까지 동북쪽으로 1,500km, 이렇게 한 주일 만에 근 5,000km를 이동했다.



2009년 당시에는 이렇게 이동했던 도로가 광역 간선도로였음에도 왕복 2차로인 구간이 적지 않았다. 지금이야 곳곳에 과속카메라가 있지만 부임하고 몇 년은 과속단속이 거의 없어 왕래가 뜸한 구간에 들어서면 시속 150km 아래로 다니는 차를 보기 어려웠다. 승용차는 그랬지만 버스에는 아예 과속 방지장치가 장착되어 있어서 시속 110km를 넘길 수 없었다. 대부분이 2차로인데다가 속도도 높일 수 없었던지라 리야드에서 아침에 떠난 버스가 타북에 도착하니 자정이 훨씬 넘었다. 하룻밤 묵고 다음날 아침에 두바까지 두어 시간을 더 갔어야 했다.


땅이 워낙 넓으니 거리에 대한 감각도 우리와는 무척 다르다. 입찰을 준비하기 위해 걸프만을 따라 200km 넘는 구간을 답사한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추풍령 정도 되는 거리여서 숙소를 두세 번 옮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담당자가 계획을 설명하는데 숙소를 한 곳만 잡았다고 했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물어보는 나를 오히려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한 곳에서 다니느냐는 내 질문에, 그러면 겨우 그 거리를 돌아보자고 숙소를 옮기자는 말이냐고 되물은 것이었다.


이들에게 200km는 한 동네에 지나지 않는다. 오만에 출장 갔을 때 현장숙소에서 저녁 먹고 맥주로 입가심하자고 80km 떨어진 도심까지 다녀왔고, 리야드 하숙집에 있을 때는 골프연습장까지 40km 넘는 거리를 저녁 먹고 운동 삼아 다녔다. 말하자면 맥주로 입가심하자고 서울에서 천안을 다녀오고, 운동하자고 수원을 다녀온 셈이다. 대충 따져보니 이곳의 거리 감각은 우리하고 두 배 정도 차이나는 것 같았다. 이들은 200km를 우리가 100km로 여기는 거리쯤으로 생각한다.


사우디는 폭이 1,300km, 길이는 서쪽으로는 홍해 따라서 1,500km, 동쪽으로는 걸프만 따라서 1,200km 쯤 된다. 넓이가 한반도의 열 배쯤 되고, 남한의 스무 배가 넘는다. 서쪽에는 홍해에서 내륙 쪽으로 100km쯤 들어와 홍해를 따라 높은 산맥이 자리 잡고 있다. 산맥은 대체로 해발 2,000m가 넘는데, 남쪽으로 내려와 예멘에 가까워지면 3,000m가 넘는다. 몇 년 전, 킹사우드대학 현장실습에 참가하느라 가봤던 아브하의 알하발라 국립공원은 3,200m가 넘었다.


홍해 항구도시 지잔에서 산맥 정상에 있는 아브하로 올라가는 도로는 급하기 이를 데 없다. 해안에서 떠나 불과 30km 거리를 가는 동안에 해발이 3,000m가 높아지는 것이니 길이 험악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아흔아홉 구비 대관령을 넘는 게 만만치는 않지만, 지금은 터널로 곧게 펴놔서 언제 넘었는지도 모르게 넘지 않는가. 하지만 아브하 가는 길을 오를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길이 험한 것이야 지형 때문이니 그렇다 치고, 산을 깎아 길을 낸 것이 아니라 산을 조금만 깎고 거기에 다리를 걸어놓은 구간이 적지 않은데, 교량구조물도 교각도 터무니없이 약해보였다. 교량이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평생 교량 설계팀과 한솥밥을 먹었는데 그 정도 감이 없었겠나. 험한데다가 좁기까지 한 길을 따라 버스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시원찮은 교량구조물과 교각이 떠올라 발밑이 간질간질했다. 지금은 좀 나아지긴 한 모양인데, 그래도 그 길을 다시 오르고 싶지는 않다.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현지인 동료가 그 길을 오르다 보면 원숭이가 따라다닐 거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야생원숭이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많은 원숭이를 본 것도 처음이었다.


사우디는 말 그대로 열사의 사막이다. 여기에도 겨울은 있어서 늘 열사인 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이 사막인 건 맞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사막과는 모습이 영판 다르다. 그저 광야, 황야라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가도 가도 끝없는 황량한 벌판, 아무 것도 없으니 거리 감각도 속도 감각도 없어진다.


동쪽 해안에 있는 담맘까지는 거리가 400km에 불과해 그쪽에 가야할 때는 늘 차를 가지고 다녔다. 국내선 항공편이 있기는 하지만, 공항이 시내와 떨어져있고 기다리는 시간도 예약하는 절차도 만만치 않아 한 번도 항공편을 이용한 일이 없다. 가도 가도 사막이다 보니 과속을 하고도 과속인 줄 모른다. 승용차는 시속 150km가 기본이었고, 200km 넘는 차도 수두룩했다. 간이 작은 나도 200km를 넘긴 일이 많은데, 의도했던 건 아니고 생각 없이 운전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느낌으로는 시속 120km 정도 쯤 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과속카메라가 설치되고 나서 속도를 시속 120km로 제한했다. 교통당국이 돈 좀 벌었겠다 싶었다. 속도 제한해놨다고 속도를 낮출 사람들이 아니니 말이다. 지난번에 출장 갈 때 보니 140km로 높아졌다. 돈 버는 것보다 운전하는 사람들 원성이 더 컸던 모양이다.


처음 사우디에 오니 선배 한 분이 가급적 야간 운전은 하지 말고, 야간에 운전해야 할 일이 생기면 꼭 울타리 있는 도로만 다니라고 신신당부했다. 밤에 낙타가 길을 건너는 일이 적지 않고, 거기에 부딪치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기는 했어도 낙타가 나올까 싶기도 하고, 부딪치면 차야 상하겠지만 죽을 일까지야 있겠나 싶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울타리 넘어 들어온 낙타를 끌어내느라 여러 사람이 애먹는 걸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울타리 한 곳이 뚫렸던지 그리로 낙타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낙타를 멀리서만 봐서 그렇게 큰 줄은 몰랐다. 몇 사람이 낙타에 달라붙어 끌어내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다지 큰 낙타가 아니었는데도 사람이 손을 들어도 등까지 닿지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몇 년 전에 한국건설회사 현장 직원들이 회식하러 도심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낙타에 부딪쳐 다섯 명이 현장에서 사망한 사고도 있었다.


고속도로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다. 차선 도색이 벗겨지고 가로등이 없는 구간도 많아 밤에 운전하는 건 모험에 가깝다. 모래바람이 수시로 불어 도로가 모래로 뒤덮이는 통에 도로 곳곳에 그레이더를 두고 이를 걷어내도 모래로 덮인 구간을 지날 때면 아찔하다. 바람이 센 곳에 바람막이가 없어 갑자기 옆바람이 불면 자칫 핸들을 놓칠 수도 있다. 화물차 통행량이 워낙 많다보니 화물차가 주로 이용하는 가장자리 차로는 노면이 움푹 패어 자칫 사고라도 날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날씨가 덥다 못해 뜨거우니 아스팔트도로가 더 쉽게 파손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요즘엔 가로등 있는 구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는 하다.


한 번은 잠시 쉬려고 간이 휴게소에 들어가서 차를 세웠다. 그늘 밑에 빈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웬일로 나무그늘 밑에 자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바닥에 모래가 깔려있기는 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떠나려는 데 바퀴가 헛돌아서 나올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왔다. 또 한 번은 고속도로를 가다가 일정이 바뀌어서 중간에 차를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있는 곳에서 차를 돌리려는데 차량 왕래가 적다보니 도로에 모래가 살짝 깔려 있었다. 어떻게 지나갈 수 있겠지 했지만 바퀴가 빠지자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일전에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휴게소와는 달리 인적이 끊어진 곳이어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해가 내리쬐니 에어컨을 끌 수도 없고,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걸어가는 건 죽을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연료도 떨어질 것이고. 생각이 복잡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고속도로로 내려가 지나는 차를 세우고 도움을 청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런데 불현 듯 삽을 든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정말 불현 듯. 하나님이 따로 없었다. 낙타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쩔쩔매는 걸 본 모양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다시는 그런 미련을 피우지 않는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고속도로를 타려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우선 물을 넉넉히 챙기고 연료도 가득 채워야 했다. 당시 리야드-담맘 고속도로 400km 구간에 휴게소가 세 곳인가 밖에 없었다. 휴게소라고 해도 주유소에, 음식점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식당 두어 곳, 다 쓰러져가는 구멍가게 같은 상점 몇 개가 전부였다. 현장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어지간한 일에 비위가 상하지 않는 나도 들어가기 꺼려질 정도였다. 지금은 개수도 크게 늘었고 시설도 상전벽해가 될 만큼 좋아졌다. 그래도 우리 고속도로 휴게소와 견주기는 아직도 멀었다.


동료들과 함께 출장에서 돌아오는데 깜빡 연료 채우는 걸 잊었다. 휴게소에서 넣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만 해도 휴게소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휴게소 한 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계기판에 연료가 떨어졌다는 불이 들어오고, 휴게소까지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도 모르겠고.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어떻게 연료를 구해 돌아올 것인지, 그게 가능하기는 하겠는지. 다시 휴게소 표지를 놓칠까 싶어 그때부터 가장자리 차로로 조심조심 운전했다. 그러다 30km 전방에 휴게소가 있다는 표지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깜빡 잊고 연료를 채우지 않아 모두가 곤경에 빠질 뻔 했던 것이다.


그곳이 리야드 들어가기 전 마지막 휴게소였다. 리야드에서 110km 쯤 떨어진 곳인데, 경치가 기막힌 곳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곳 사막은 사막이 아니라 광야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사막은 몇 곳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이 몇 곳 되지 않는 ‘붉은 사막’ 중 하나이다. 동부지역으로 출장 다녀오다 이곳을 지날 때쯤이면 대개 해가 넘어가는데, 그렇지 않아도 ‘붉은 사막’이 석양에 물든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런 풍경 덕분에 고단을 잠시 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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