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교가 끝나는 강변북로에 ‘괴르츠’라는 곳이 있다. 발아래로 밤섬이 보이는 곳이어서 참 자주 갔다. 아내와도 자주 갔고, 격의 없을만한 손님도 이곳에서 자주 만났다. 창밖으로 한강 풍경 내려다볼만한 곳이 어디 여기뿐일까 마는, 굳이 이곳이었던 건 밤섬에 걸려있는 내 어린 흔적을 더듬을 수 있어서였다.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는 마포가 끝이었다. 전차종점을 지나 언덕으로 올라서면 왼쪽으로는 원효로로 돌아나가고 오른쪽으로는 둑길이 길게 이어졌을 뿐이었다. 마포나루에는 언제나 놀잇배로 가득했고, 거기서 나룻배가 밤섬을 오갔다. 그때만 해도 물이 맑아 여름이면 마포강에서 멱 감으며 놀았다. 가끔 온 가족이 수박 한 통 들고 밤섬에 가서 놀다오기도 했는데, 당시로서는 그게 아주 훌륭한 피서였다.
지금도 밤섬에 있던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 한쪽에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수박을 담가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밤섬에 무슨 산이 있겠나 하는 이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언젠가 밤섬 옛 사진을 본 일이 있는데, 산이 생각했던 것만큼 높지는 않았고 그저 야트막한 둔덕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다. 어렸을 때이니 크게 보였겠지.
어느 여름인가 온 가족이 밤섬에 놀러갔는데, 돌아오는 나룻배에서 군복을 입은 해군 두 사람이 앞에 서서 주거니 받거니 만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해서 사람들이 아주 흥겨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밤섬에서 마포나루까지 좋이 이삼십 분은 걸리지 않았을까 싶다. 배에 탄 사람이 열댓 명은 되었을 듯도 싶고.
그 아름답던 밤섬이 어느 날 한강 물길을 막는다고 폭파되어 없어졌다. 그때는 이미 돈암동으로 이사하고 난 이후라 없어질 때 상황은 아는 게 없고, 나중에 섬은 없어지고 주민들은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창전동 산기슭으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기록을 보니 밤섬이 없어진 사연이 각각이던데, 나는 홍수 날 때마다 망원동이 물에 잠겨 그거 해결하느라고 밤섬을 없앤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서울에 물난리가 참 많이 났었다. 비가 어지간히 왔다 싶으면 물난리 소식이 빠지지 않았다. 늘 잠기던 곳이 잠겼는데, 잠기는 곳이 하나같이 예전에 집이 없던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늘 물에 잠기는 곳이라 아예 집을 짓지 않던 곳이었는데,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집을 지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자연을 거슬러 집을 지은 대가가 아닐지.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대비를 하던가.
마포강에 가면 놀잇배 사이를 건너뛰며 놀았다. 놀잇배라는 건 말하자면 이동식 객주가 쯤으로 생각하면 맞겠다. 술상 거나하게 차려놓고 작부가 옆에서 흥을 돋우고 뱃전을 스치는 강바람을 맞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걸 낭만으로 여겼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도 그런 모습이 괜히 부끄러워 외면했었다. 어느 날인가 뱃전에서 들고 뛰다가 놀잇배 매어놓은 줄이 풀리고 나는 물에 빠졌다. 배에 매달렸으니 빠져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몸이 배 밑바닥으로 자꾸 끌려들어가는 것이었다. 얼마나 기겁을 했던지 그 후로 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수영을 하지 못한다.
‘괴르츠’는 차가 없으면 가기 어려운 곳이어서 사우디 부임한 후로 한 번인가 가봤다. 짧은 휴가동안 갈 엄두 내기도 쉽지 않고. 사실 광흥창역에서 바삐 걸으면 십 분 남짓한 거리이니 못 갈 것도 없는데. 이번에 가면 꼭 한 번 찾아보리라. 폭파하고 모래톱만 남았던 것이 몇 십 년 사이에 원래 밤섬보다 더 크게 자랐다니 혹시 옛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