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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방송극

by 박인식

1961년 TV방송이 시작됐지만 일반 가정에 TV가 보급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당시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면 쿠폰 같은 걸 나눠줬는데 그게 몇 장 모여야 저녁에 만화방에서 틀어주는 TV를 볼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라디오가 유일한 문화시설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집집마다 라디오가 있는 게 아니어서 라디오 있는 집에 모여 방송을 듣곤 했다. 당시에 ‘연속방송극’이라고 불리던 라디오 드라마 인기가 대단했다. 20분짜리 방송이었고 한 작품이 대체로 한 달 정도 방송했던 것 같다. 저녁 7시, 8시, 9시에 방송했는데 남의 집에 가서 들어야 하는 것이니 아마 7시 방송극을 주로 듣지 않았나 싶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직장 따라서 온 가족이 파주로 이사 가고 나만 서울에 남았다. 하숙도 하고 자취도 하면서 라디오가 친구가 되었다. 내 라디오가 있을 리 없으니 같은 집에 세 들어 살던 옆방에 놀러가 방송극을 듣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연속극 듣자고 이웃집에 놀러가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아서 그게 흉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드라마가 하나 있다. ‘심장이식’을 소재로 한 아주 이색적인 드라마였다. 세계 최초로 심장이식이 이루어진 1967년에서 불과 한두 해 지났을 때 방송된 것이었으니 아주 실험적인 드라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십 년 훨씬 넘게 흐른 후 우리나라에서 심장이식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어느 청년이 사고로 사망하고 그 청년의 심장을 어느 중년 남자가 이식받는다. 청년에게 오랫동안 사귀던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사랑했던 이의 심장소리라도 들어보겠다고 중년 남성을 찾아간다. 이식받은 사람으로서는 자기 애인의 심장이라며 자기가 원할 때 심장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여인의 엉뚱한 요구에 난감해했지만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껏 그 드라마가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주제곡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TV 드라마 주제곡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예전에는 TV 드라마마다 주제곡이 있었는데. 정훈희 씨가 부른 ‘꽃동네 새동네’는 최근까지도 들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때 들었던 연속극 주제곡이 임희숙 씨가 부른 ‘왜 울어’이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작곡한 김희갑 씨의 작품인데 그 후로 송창식 씨도 불렀다. (오늘 송창식 씨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오래 전에 들었던 이 연속극이 생각나 이 글을 쓰고 있다.)


비바람 불어오면 젖어서 가오리다.

어둠이 밀려오면 불 밝혀 가오리다.

다지고 떠나온 길, 웃으며 넘던 고개

그 길에 홀로 서서 오늘은 왜 울어 왜 울어

나그네 발자욱에 눈물이 고였고나.


한 세상 사노라면 개인 날 있으리다.

한 세상 사노라면 궂은 날 있으리다.

알고서 떠나온 길, 웃으며 걸어온 길

그 길에 홀로 서서 오늘은 왜 울어 왜 울어.

나그네 발자욱에 눈물이 고였고나.


하나 풀리지 않는 게 있다. 당시 그 연속방송극을 듣던 상황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게 1968년이었다. 검색해보니 임희숙 씨가 ‘왜 울어’를 발표한 것은 1969년으로 나온다. 당시 하숙하다가 말썽을 일으켜 하숙집에서 나와 친척집 다락방에서 몇 달 지낼 때 들었던 것이어서 년도를 혼동할 일이 없다. (하숙할 때 대학생 형들과 같은 방을 썼는데 어느 날 밤에 천둥소리가 무서워 방문을 잠그고 자다가 형들이 방에 들어오지 못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게 빌미가 되어서 하숙집을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되었는데, 문 잠그고 세상모르고 잔 게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고 아마 중학생과 한 방을 쓰는 게 내내 불편했던 대학생 형들의 불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고 몇 년 후의 일이지 싶은데 아주 기억에 남는 단막극이 하나 있다. 신년특집 단막극 이었다. 꽤 긴 드라마였는데 (40~50분쯤 되지 않았을까) 단 두 사람이 앉아 이야기 나누는 게 전부였다. 여성 주인공은 김세원 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헤어졌던 연인이 만나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지난 시간을 되짚어가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게 된 전 과정을 두 사람의 대화로 풀어낸 것이다. 어렸을 때니 뭐 제대로 작품을 평가할 안목이 있었겠나만, 숨도 쉬지 못하고 이야기에 몰입되었던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꽤 짜임새 있는 드라마가 아니었다 싶다. 그 후로 그런 형식의 드라마를 본 일이 없다.


흔하지는 않지만 요즘에도 오래도록 회자되고 소환되는 드라마가 있다. 하지만 김세원 씨가 출연했던 신년특집 단막극 드라마처럼 두 사람만의 대화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독특하고 흡인력 있는 드라마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방송국에 어지간한 자료는 다 남아있다고 하는데 혹시 ‘왜 울어’(제목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나 김세원 씨가 출연했던 신년특집 단막극(1969년이 아니었을까)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신년특집 단막극 드라마는 아마 지금 방송해도 어색하지 않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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