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에 있는 공덕국민학교에서 5학년을 마치고 돈암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처음 학교에 가던 날 학교가 얼마나 크고 학생은 얼마나 많은지 같은 서울 안에서 전학을 왔는데도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당시 6학년이 17반까지 있었고 교실마다 백여 명 가까운 아이들이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책상에 두 명이 앉았고 한 분단에 열 줄, 한 반이 다섯 분단이었다. 우리 반은 97명이었다. 당시 교실이 지금보다 더 컸을 리는 없으니 결국 지금 30명 남짓한 아이들이 사용하는 교실을 백여 명 가까운 아이들이 사용한 것인데, 지금 젊은이들은 물론 글을 쓰는 나조차도 믿기 어려운 숫자이다.
교무실이 있는 중앙 현관에 교세현황판이 있었다. 학년별 학급 수와 학생 수를 표시한 것이었는데, 내가 본 중에 가장 큰 숫자가 1만 3백 명이었지 싶다. 어떻게 학생이 만 명이 넘는 초등학교가 있을 수 있냐고 하겠지만 당시 서울에 만 명 넘는 학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서대문에 있는 미동국민학교가 서울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았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학생이 많은 학교라고 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전농국민학교도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교실이 부족하다 보니 1ㆍ2학년은 3부제, 3ㆍ4학년은 2부제였고, 5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 학급이 온전히 한 교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전농초등학교 1967년과 지금 모습>
지금이야 중학교는 배정받은 대로 가지만 우리 때는 입학시험을 치렀다. 나는 1967년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우리 학년부터 동계진학이라고 해서 중학교에 입학하면 시험을 보지 않고 고등학교까지 진학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없어지니 원하는 중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이 고등학교 가면서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고, 따라서 중학교 입학시험이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제도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우리와 다음 학년만 적용받았고 2년 후에 소위 ‘뺑뺑이’라는 추첨제로 바뀌어서 비로소 말도 되지 않는 입시지옥에서 어린아이들이 풀려날 수 있었다.
돈암국민학교로 전학을 가고 보니 공덕국민학교와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학생도 많았고 그래서 경쟁도 더욱 치열했다. 공덕국민학교에서 성적이 쳐진 편은 아니었는데 전학가고 처음 본 시험에서 성적이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다. 부랴부랴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파하고 와서 저녁 먹고 쉴 틈도 없이 과외공부를 가야했으니 학교 수업시간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과외공부라고 하지만 교실에 큰 칠판이 걸려있었으니 거의 학원 수준이었다. 아마 서너 시간은 수업을 했지 싶다.
6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과외공부에서 합숙을 시작했다. 학교 파하면 집에 가서 도시락 내놓고 저녁 먹고 바로 과외공부하러 갔다. 잠은 네 시간만 잤다. 밤 열두시까지 공부하면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수업 받은 후 집에 갔고, 새벽 두시까지 공부하면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집으로 갔다. 집에 가서 씻고 아침 먹고 도시락 챙겨서 학교에 갔다. 휴일도 없었다. 이제 열두 살 열세 살 아이들을 네 시간만 재우고 공부시킨 것이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보니 간식도 없었다. 한참 재우고 먹여야 할 아이들을 그렇게 혹사시킨 것이다. 도대체 학벌이 뭐라고. 지금은 대입준비생은 물론 고시준비생도 그렇게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1969년 중학교 입학생부터 추첨제가 시작됐다. 그때 대통령 아들이 공부를 못해서 입시 제도를 바꿨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통령이 그냥 아들을 입학시키면 되지 뭐 하러 온 국민이 첨예하게 관심을 두고 있는 입시 제도를 바꿨겠나. 그때 입시 제도를 바꾸지 않았더라도 이미 아이들이 견딜 수 없는 정도까지 경쟁이 과열되어서 그 후로 한두 해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제 갓 십대에 들어선 아이들이 네 시간만 자고 입시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었겠나. 하지만 그때도 추첨제로 바뀐다는 발표에 낙심한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마 1년도 남겨놓지 않은 채 발표했지 싶은데, 상위권을 목표로 일찍부터 입학시험을 준비한 아이들로서는 그동안 쏟은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왜 낙심이 되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발표를 듣고 낙심한 어린이들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
입학시험 과목에는 국산사자(국어ㆍ산수ㆍ사회ㆍ자연) 외에 음악ㆍ미술도 있었고 체능시험도 있었다. 음악ㆍ미술도 국산사자와 다름없이 공부했다. 얼마나 지독하게 공부했는지 지금도 6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린 노래의 악보를 그대로 그릴 수 있다. 당시에 음악책에 실려 있는 모든 노래를 한 곡도 빼지 않고 형식ㆍ박자ㆍ작곡자 같은 기본 내용은 물론이고 계명도 외우고 각 음표의 박자도 외웠다.
음악책에 실린 첫 노래가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로 시작하는 이은상 작시 현제명 작곡의 ‘대한의 노래’였다. 음계는 ‘미도솔 도레미도 파미레도솔’로, 각 음표의 박자는 ‘이사사 산파사사 사사사사사’로 시작했다. ‘이’는 이분음표 ‘사’는 사분음표 ‘파’는 팔분음표였고 거기에 점이 붙으면 니은 받침을 붙여 ‘인ㆍ산ㆍ판’으로 읽었다. 오선지 내놓고 한 번 그려보라. 이 정도면 악보를 충분히 그리고도 남지. 그때 이런 내용을 담은 음반이 나오기도 했다. 음악 책에 실린 모든 노래를 해설과 함께 LP 대여섯 장에 담은 것이었다. 당시 음반을 틀만한 전축을 가진 집도 드물었던 때라 음악시간에 학교 방송으로 들었다. 당시 노래를 KBS 어린이 합창단원이었던 여학생이 불렀는데, 바로 옆집 살던 한 학교 아이어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미술도 다르지 않았고 체능시험은 실제로 운동장에서 시험을 봤다. 말하자면 체력장 같은 것이었는데, 100미터 달리기, 턱걸이만 생각이 난다. 검색해보니 팔굽혀펴기도 있었다. 당시 1차 시험에는 5대 공립중학교라는 경기ㆍ서울ㆍ경복ㆍ용산ㆍ경동과 사립학교로 보성중학교가 선두그룹으로 손꼽혔다.
전학 가서 중하위권을 맴돌던 성적이 차츰 나아져서 졸업할 무렵에는 상위권으로 올랐고 담임선생께서 합격을 장담했던 몇몇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1차 시험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고 2차인 신일중학교로 진학했다. 신일중학교는 신설학교로 내가 첫 입학생이다. 그러니 학교에 대한 정보도 있을 리 없었다. 그저 1차에 떨어졌다니 화가 나신 담임선생께서 신설학교인 신일중학교나 가라고 원서를 써주셔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홧김에 원서를 써준 그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지금 이 모양이라도 사람 꼴 하고 살게 되었으니, 내게는 1차 시험 낙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