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Dec 10. 2020

[사우디 이야기 22] 은행

사우디 이야기 (22)

지난 12월 4일자 아랍뉴스에 올 들어 10월까지 외국인 근로자가 자국으로 송금한 액수가 무려 329억 달러(36조 원)에 이른다는 기사가 났다. 엄청난 금액이다. 그러나 사우디 인구 중 외국인이 37%에 이르고 70% 넘는 취업자가 외국인인 걸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2018년 사우디 통계청) 인근 몇몇 나라는 사우디에 보내는 송금이 국가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보도도 자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은행 고객 중 상당수가 언제 떠날지 모르는, 그러나 언젠가는 떠날 외국인이다. 송금 규모가 이 정도이니 사우디 정부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어서 이에 주목하게 되고, 이는 어떤 형태로든 외국인의 금융거래를 까다롭게 만드는 정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도 그렇지만 은행거래는 사인(私人)간의 거래이기 때문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한 거래과정에서 일어나는 채무를 정부가 인지할 수 없다. 사우디에 거주하던 외국인이 사우디를 아주 떠날 때 거주허가를 반납하고 최종출국비자(final exit visa)를 받아서 출국하는데, 이 과정에도 채무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없다. 외국인이 채무를 남겨둔 채 출국하는 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게다가 외국에 여행할 때 발급받는 출입국비자(exit/reentry visa)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이래저래 외국인 채무에 대해 은행이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신용카드 발급받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야 급여통장만 있으면 카드사에서 서로 발급해주겠다고 할 텐데, 이곳에서는 발급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신용카드 발급 받은 게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은데, 급여기록이 석 달 치는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이까마 받느라고 몇 달 고생하고, 받고나서도 신용카드 발급에 필요한 급여기록이 만들어질 때까지 몇 달이나 기다려야 해서 몹시 짜증스러웠다.


신용카드야 채무가 발생하는 것이니 그렇다고 이해하겠는데, 계좌 여는 절차도 까다로운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계좌를 개설하려니 회사나 스폰서의 공문(재직증명서)을 제출하라고 했다. 내 돈 예금하고 내가 찾아서 쓰겠다는데 왜 회사 공문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은행에서 별도로 지정하는 양식은 없었고 성명ㆍ이까마 번호ㆍ입사일자ㆍ직위ㆍ급여가 들어있으면 되었다. 첫 날은 이를 몰라서 돌아오고 다음날 공문을 가져가 그 자리에서 통장을 개설하고 현금카드도 발급받았다. 공문만 있으면 누구나 바로 계좌를 열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신용카드를 발급받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지만, 계좌 개설할 때 받은 현금카드를 온라인 결제 말고는 모두 사용할 수 있어 신용카드가 없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이곳 현금카드는 별도로 신청하지 않아도 외국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열려있다. 현금인출기 자체는 한국보다 오히려 많은 것으로 보이고, 특히 주유소에 대부분 설치되어 있어 굳이 현금인출기를 찾아갈 일이 없다. 이곳은 타행 현금인출기를 사용할 때 수수료가 붙지 않아 어느 곳에서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한국 현금카드에 유효기간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곳은 모든 현금카드의 유효기간이 3년이다. 한 번은 현금인출기를 이용하려고 카드를 넣었는데 현금인출기가 카드를 삼켜버리고 더 이상 거래가 진행되지 않아 몹시 놀랐던 일이 있다. 유효기간이 넘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럴 땐 그저 은행에 가서 새것을 발급받으면 된다.


계좌를 열고나서 거래는 대부분 인터넷뱅킹으로 처리했다. 인터넷뱅킹은 해당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해 가입한 후 지점을 방문해서 이를 신고하면 된다. 이때 인터넷뱅킹 접속을 위한 인증번호를 받을 수 있는 전화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공인인증서와 보안카드를 이용해 인터넷뱅킹에 접속하고 거래하지만, 이곳에서는 등록된 전화번호로 접속과 거래에 필요한 인증번호를 매번 보내준다. 보안카드보다는 이 방법이 해킹 우려가 덜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한국도 그렇다는 것 같던데, 한국 전화를 켜놓을 수 없는 이곳에서는 아직도 한국 인터넷뱅킹을 이용할 때 보안카드를 사용한다.


인터넷뱅킹으로 국내외 송금 뿐 아니라 SADAD 요금을 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자동이체를 신청하면 매달 자동으로 요금이 빠져나가지만, 이곳은 자동이체는 없고 SADAD라는 독특한 지불시스템이 있다. 비자ㆍ운전면허ㆍ차량등록ㆍ교통범칙금과 관련해 정부에 납입해야 할 수수료뿐만 아니라 통신ㆍ전기ㆍ수도 요금은 물론 항공료까지도 지불할 수 있다. (현재 등록되어 있는 업종이 150 종류가 넘는다.) 수수료나 각종 요금 청구서에 가상계좌를 함께 보내주는데, 그 가상계좌를 자기 인터넷뱅킹 계좌 ‘payment’ 폴더에 등록해놓으면 납부해야할 요금이 자동적으로 올라오고, 거기서 바로 지불할 수 있다.


송금절차는 다소 까다로운 편이다. 외국인 근로자 송금 규모가 워낙 크니 해외송금 절차가 까다로울 뿐 아니라 사우디 다른 은행으로 송금하는 것도 절차가 하나 더 있다. 송금하기 위해서는 송금 받을 계좌를 등록해야 한다. 인터넷뱅킹으로 해외송금하기 위해서는 온라인으로 송금 받을 계좌를 등록한 후 지점에 가서 이를 신고해야 한다. 국내송금일 경우에는 온라인으로 등록만 하면 되고 지점에 가서 신고할 필요는 없다. 등록하고 신고하는 절차가 번거롭기는 한데, 사용하다 보니 송금사고를 예방할 수 있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해외송금 한도나 수수료는 은행마다 다르다. 나는 두 곳을 이용하는데 한 곳은 한 번 송금할 수 있는 한도가 6백만 원(2만 리얄)인데, 다른 한 곳은 9천만 원(30만 리얄)이다. 워낙 해외송금하는 외국인 근로자가 많다보니 해외송금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금융기관도 많다. 우리 직원들 경우를 보니 외국에 계좌가 없어도 수취인 인적사항이나 연락처를 표시한 전신환 같은 형태로 보내기도 한다.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발행인과 수취인을 표시한 당좌수표를 아직도 많이 사용한다. 한국에서야 이미 송금이 일반화 되어 있어 당좌수표를 사용할 일이 없고, 예전에 당좌수표를 사용할 때도 주로 기업 사이의 거래에 한정되어 있어 일반인들은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급여통장은 급여만 입금하지 다른 경비를 입금하지는 않는다. (회계처리 기준이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액수가 큰 비용을 지급받을 때는 매번 당좌수표로 받는다. 당좌수표는 수표에 명시된 수취인만 인출할 수 있기 때문에 현금으로 찾기 위해서는 꼭 본인이 가야하는 불편함이 따르지만, 그래서 안전하기도 하다. 잃어버리면 번거롭기는 하지만 취소하고 재발행하면 된다.


수표를 현금으로 찾거나 은행거래를 할 때 본인 확인을 하는데, 이때 외국인은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은 이까마만 사용할 수 있다. 이까마 유효기간이 지나도 안 되고,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여권이나 운전면허증도 안 된다. 말하자면 본인 여부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 적법하게 체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외국인을 옥죄는 금융 규제가 하나 있다. 정부로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규제받는 외국인은 이 때문에 큰 불편을 겪는다. 나도 그런 경우를 당한 일이 있다. 이곳에서는 이까마 유효기간이 만료되면 그 즉시 모든 금융거래가 동결된다. 그래서 이까마를 갱신하면 반드시 은행에 가서 갱신 사실을 신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은행계좌만 동결되는 게 아니라 신용카드도 동결된다.


모든 금융거래가 동결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불편한 일이다. 이곳에서는 현금거래가 거의 없고 모두 신용카드나 현금카드를 사용하고, 요즘 들어서는 모바일 페이를 이용하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현금 사용이 적으니 큰돈을 내면 거스름돈이 모자라 시간이 더 걸리기도 하고, 온라인에서 지불할 방법이 없으니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다.


회사 면허갱신에 문제가 있어 한동안 이까마를 갱신하지 못해 은행계좌뿐 아니라 신용카드도 동결된 채 지냈다. 마침 코로나로 음식점은 문을 열지 않고 배달만 할 때였는데, 결제할 방법이 없으니 음식을 시킬 수 없었다. 하다못해 피자 하나 햄버거 하나도 사먹을 수 없었다. 그것뿐 아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정부에서 쇼핑몰에서 현금 대신 카드로만 지불하도록 방침을 정한 때가 있었는데, 그때 운동모자 하나 사러갔다가 현금 지불을 거절당해 다른 물건 사러 온 사람에게 부탁해 그 사람 카드로 지불한 일도 있었다.


동결된 계좌는 이까마 갱신 사실을 신고하는 즉시 풀린다. 그러나 그것도 6개월이 넘어가면 계좌가 아예 폐쇄된다. 다시 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럴 때는 번거롭지만 같은 은행에 계좌를 다시 열면 이전 거래 기록이나 등록되어 있는 모든 지불계좌ㆍ송금계좌가 그대로 따라온다. 그럴 거라면 동결했던 계좌를 풀어주면 되지 왜 굳이 새로운 계좌를 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규제가 있다고 해서 외국인의 금융거래 자체가 제약을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곳에 적법하게 체류하고 취업조건에 맞게 활동할 경우 실질적으로 제약은 없다. 이곳에 불법 체류자나 취업목적과 다르게 체류하는 외국인이 워낙 많으니 그러는 것이기는 하겠다. 그렇기는 해도 계좌에 돈을 넣어놓기도, 송금하기도 조심스럽다. 왕국이니 언제가 되었건 왕명 하나로 외국인 계좌를 동결할 수 있는 나라이고, 외국인 송금에 세금을 매기지 않겠다는 보도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걸 보면 (다시 말해 그런 정책을 검토하기는 했다는 것이니, 그래서 언제 과세하게 되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저 이곳에 잔고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우디 이야기 21] 지하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