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처럼 남에게 설득되지 않는다. 오늘 아침, 남에게 설득되지 않는 것이 교만의 첫 번째 증상이라는 설교를 들었다. 내게 교만할 조건도 없을 뿐더러, 그런 중에도 주제넘게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닐까 늘 조심했다. 그래서 스스로 교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교만한 사람치고 스스로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더니,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인 줄 오늘 비로소 알았다.
우리는 기대한 것을 얻을 때 감사하고, 기대하지 않은 것이나 기대한 것 이상 얻을 때 감동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감사의 제목이 아니라 감동의 제목이 되어야 하겠다.
내가 누리는 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선물인 것을 잊지 않으려고 늘 애쓰고 있다. 선물로 받은 것을 내 것인 양 여기다 망가진 사람을 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위해서 기도하는 이웃이 있다. 기억하고 기도하다 보니 자연히 그들의 삶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복을 부어주셔도 덧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하다가 그 가정 순서가 되면 오히려 더 힘이 난다.
어제 일이 있어 통화하던 중에 문득 기도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기억나서 내가 그렇게 기도하노라 이야기를 했다. 면전에서 칭찬하는 게 어색하기도 해서 그건 칭찬이 아니라 망가지지 말라는 경고라고 사족을 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마치고 가만 생각해보니 정말 칭찬이 아니라 경고가 맞겠구나 싶다. 복을 붓고 또 부어도 덧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큰 상이 되겠지만, 그 복을 자기 것인 줄 알고 건방을 떨면 그보다 큰 재앙이 없을 테니 말이다.
직장생활 사십 여 년 중 절반을 한 상사를 모시고 일했다. 이십 년을 부대끼다 보면 별 일이 다 있을 만도 한데 지시를 거스른 기억이 없다.
능력이 출중한 분도 아니었고 두드러진 강점이 있는 분도 아니었다. 호인이었지만, 그것이 이십 년을 한결같이 모실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니지 않았겠나. 그런 그분께 한 가지 남다른 면이 있었는데, 바로 아랫사람 의견에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 생각했거나 자기 생각보다 나은 방안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때로는 아랫사람 생각과 다른 결정을 내린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이미 의견을 충분히 들은 후 내린 결정이니 거기에 토를 달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 그 결정이 대체로 옳았다.
뜬금없이 아침에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다. 그렇게 보고 배웠으니 그렇게 살았어야 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렇지 못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끝까지 듣는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도 아니었고, 그걸 견디기엔 내 주장이 너무 강했다.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남은 시간만이라도 닮아가려고 애를 써야하겠다.
그 상사께서는 일흔 여덟이신 올해에도 여전히 원전건설 현장에서 감리단장으로 일하고 계신다. 재작년에 사모님을 잃으셨는데 아직 찾아뵙지 못했다. 내일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십여 년 이곳에 사는 동안 습관이 되기도 했고 나이 들어가면서 양도 줄어 한국에 돌아가도 식사는 그대로 두 끼를 하기로 했다. 식사 준비를 함께 하자고 하니 아내가 날더러 아침만 준비하란다. 봐주겠다는 건지 맛없는 음식 먹기 싫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는데, 그렇지 않아도 허물 많은 사람이 말 수를 줄이지 못해 허물을 키우고 산다.
깨닫는 건 회개가 아니다. 돌아서야 회개인 것인데, 늘 깨닫기만 하고 회개했다고 착각하며 산다.
이미 십자가는 우리 믿음의 상징이 되어 아름답게 빛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의미하는 치욕과 고통을 잊고 지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 자신이 겪으신 수난이 얼마나 큰지 늘 잊고 산다. 그걸 잊고 사니 삶이 달라질 수 있겠나.
왜 나일까? 왜 나를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복을 부어주시는가? 자격으로 말하자면 가당치 않은 일인데. 그런데도 그렇게 복을 부어주신 이유가 무얼까. 내게 주신 게 아니라 흘려보내라고 맡기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그저 과분한 것이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그쳤구나. 과분하기는 하지만 내 것이라고 여기고 움켜쥐고 살았다는 말이다.
신명기를 읽어나가다 모세가 하나님께 ‘요단을 건너가게 하사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주십사’ 구하는 장면에 이르면 늘 가슴이 아렸다. 비록 하나님 명령을 거역했다고는 하나 사십 년 백성을 이끌어온 모세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모세가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아 노추로 얼룩지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은혜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래서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사순절에 뜬금없이 신명기를 읽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문득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모세의 간구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묵상하다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자신은 죄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후손들은 스스로 삼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잊지 않음으로 요단을 건너 아름다운 땅을 얻기를 당부’하는 모습에 눈길이 끌렸다.
모세를 가나안에 들이지 않으신 것은 모세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반면교사로 가르치신 것이었다.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이적과 기사와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신 모세조차 징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분명한 가르침이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내 걸음이 어딘가 바른 길에서 벗어난 모양이다. 왜 뜬금없이 신명기에 끌렸나 싶었는데, 내게 경고가 필요했었나 보다. 삼가고 근신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