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87년이었을 것이다. 회사가 합병되면서 직장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합병 반대에 앞장섰던 피인수기업 직원으로서 인수기업의 문화에 선뜻 동조하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직장예배를 전도사께서 인도하셨는데, 아주 젊은 분은 아니었고 돌아가신 선대 회장께서 직접 모셔온 분이라고 했다. 원고 없이 설교하셨지만 언어가 아주 정제되어 있어 받아 적으면 그대로 글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 언어만큼이나 내용도 정제되고 절제된 것이었다. 그 분이 인도하신 예배를 드리고 나서 더 이상 동료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당시 직장예배는 그룹사 위치에 따라 몇 곳에서 나누어 드렸는데, 그 중 퇴계로와 여의도 예배를 그분께서 인도하셨다. 어느 날 동료가 지난 주 설교 테이프를 전해줬다. 여의도 예배는 녹음하지 않는데 어찌된 일인가 물으니 퇴계로 예배 때 녹음한 것이라고 했다. 원고 없이 한 설교였는데 두 설교가 토씨하나 다르지 않았다. 암기해 설교하신 것이었고, 그분은 그것을 예배에 참석한 분들에게 지켜야할 최소한의 예의로 여기셨다. 훗날 은퇴를 얼마 앞두고 암으로 몇 년 고생하셨다. 몇 년 만에 강단에 복귀하셔서 힘에 부쳐서 설교를 암기하지 못했노라고, 그래서 원고 설교를 양해해달라고 하셨다. 암기해 설교하는 것이 그 정도 진을 빼는 일인 줄 그때 알았다. 어느 정도 회복하시고 나서는 끝내 암기 설교를 다시 시작하셨고, 그렇게 은퇴하셨다. ‘30호 가수’인 아들 때문에 화제의 주인공이 된 이재철 목사님이다.
나는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한 때 열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교회 일에 매달리기도 했다. 두 해인가 아예 교회를 떠난 일도 있었지만, 다행히 오래 헤매지 않고 제자리를 찾아 무난하게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신앙적 체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한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이 그냥 그날이 그날 같은 상태로 지내고 있을 때 이 목사님을 만났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산지 이십 년 만에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 과연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분 설교는 사람을 뜨겁게 달구지 않았고, 감동으로 눈물 흘리게 만들지 않았으며, 추상같은 질책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잠을 부르기 딱 좋을 만큼 부드러운 음성에 어조 역시 잔잔했다. 그런데 그 음성에 내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개척해 시무하시던 ‘주님의 교회’ 교인이 크게 늘면서 더 이상 직장예배를 인도하기 어려워 두 해 만인가 그만두셨지만, 목사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시무하시던 교회에서 하신 예배 설교는 빼놓지 않고 들었다. 은퇴하실 때까지 그랬다. 헤아려보니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주님의 교회’에 계실 때는 직장 동료가 설교 테이프를 구해다 주었고, ‘제네바 한인교회’에 계실 때는 그곳 교우분의 도움으로 몇 달치씩 우편으로 받았고, ‘백주년 기념교회’에 계시는 동안에는 파일을 내려 받았다. 제네바는 물가가 워낙 비싸서 설교를 보내주시는 교우께서 돈보다 빈 테이프를 보내달라고 해서 삼 년 동안 빈 테이프를 보내고 설교 테이프를 받았다. 그러던 중에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공부 테이프를 구하게 되었다. ‘새신자반’이라는 성경공부였는데, 제목과는 달리 새신자 교육이 아니라 기존 교인들을 위한 재교육이었다. 아마 그때를 계기로 내 삶이 바뀌었던 것 같다. 테이프 스무 개로 이루어진 강의를 열 질 넘게 샀고 얼마 후에 출간된 ‘새신자반’ 책도 그만큼 사서 주변과 나눴다.
목사님께 성경공부를 청했던 몇몇 분들을 중심으로 가정집에서 시작된 ‘주님의 교회’는 이후 출석교인 5천 명이 넘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당초 약속하신 대로 10년 사역을 마치고 퇴임하셨다. 교회에서 감사의 뜻으로 유럽에서 공부하실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퇴임 때 IMF 사태가 터지면서 스스로 사양하셨다. 그때 교회가 나뉘어 아픔을 겪던 제네바 한인교회에서 목사님께 교회를 이끌어주기를 부탁해왔다. 퇴임 후 모든 사역을 사양하셨지만, 재정이 부족해 가족을 초청할 수는 없다는 말에 오히려 흔쾌히 부임해 삼 년을 자취하며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러면서 나뉘었던 교회가 다시 하나로 회복되도록 만드셨다. 제네바에서 돌아오신 후 어느 교회에선가 중고등부 교사로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늘 “나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어서 나도 더 이상 목사님을 찾지 않았다. 그러다 백주년 기념교회에 부임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나를 버리되 철저하게 버리라”는 마지막 설교를 뒤로하고 거창 산골짜기로 내려가셨다.
백주년 기념교회에서 있었던 일화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어 더 보탤 것이 없다. 다만 시무하시는 동안 리야드를 두 번 다녀가셨고, 두 번 모두 가까이 뵐 수 있어서 몹시 행복했던 이야기를 나눌까 한다.
부임해 출석하던 교회에 이영표 선수 가족이 출석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어느 팀에선가 뛰다가 사우디 알힐랄 축구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예의바르고 겸손했지만 조금 수다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모든 교우들이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다. 어느 날 이 목사님께서 리야드에 오신다고 했다. 두바이 한인교회 집회 인도하러 오신 길에 가까이 지내던 이영표 선수 집에 들르시겠다는 것이었다. 교회에서는 부랴부랴 이영표 선수에게 청을 넣어 목사님께 설교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교회를 대신해 내가 두바이로 마중을 나갔다. 두바이 한인교회 집회에 참석해 목사님 내외분을 만났다. 리야드로 모시고 오면서 직장예배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매우 반가워하셨다. 리야드에 머무시는 사흘 내내 모시고 다녔다. 사막으로 광야로. 그러면서 틈나는 대로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앙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었고, 귀찮게 여기지 않고 대답해주시는 것을 하나라도 놓칠까 일일이 받아 적었다. 마침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 목사님과 이영표 선수의 축하 영상도 덤으로 얻었다.
사모님은 내 또래셨는데, 정신여고 ‘틴라이프 사중창단’ 그룹의 일원이셨다. 여학생 넷이 여러 악기를 돌려가며 연주하고 율동도 하는 찬양중창단으로, 당시 서울에 있는 기독교학교에서 아주 유명했다. 생각해보라, 오십 년 전에 여학생이 악기 연주하고 춤추며 그것도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이었을지. (당시 나는 교회에서 기타 치다가 마귀라는 소리도 들었다.) 요즘 아이돌에 버금가는 인기인이었던 셈이다. 당시 내 모교인 신일학교는 정신여고를 사이에 두고 대광학교와 기싸움을 하곤 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당시 인기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셨다. 사모님께서 그동안 그렇게 설명해도 믿지 않더니 이제 증인에게 이야기 좀 들으라고 기세등등해 하셔서 목사님과 함께 크게 웃기도 했다.
목사님이 다녀가시고 나서 교회 때문에 갈등을 겪었다. 스승으로 여기는 분이셨고 교회 사정도 알고 계셔서 조언을 부탁드렸다. 내 생각이 그렇다면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옮기라고 하셨다. 다만, 옮기는 그 교회가 리야드에서 출석하는 마지막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오금을 박으셨다. 덕분에 고비가 있었지만 옮긴 교회에 십 년 넘게 잘 다닌다. 아들 결혼식 무렵에 아들 내외를 앞세우고 교회를 찾아 인사드리고 교회 식당에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시 한 번 리야드를 찾으셨다. 목사님 내외분을 위한 식사 자리에 우리 내외도 부르셨는데, 거기서 이전 교회 목사님과 화해를 위해 특별히 ‘화목제’를 주제로 설교해주신 말씀은 지금까지 내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말한 대로 사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이 목사님은 그런 분이셨다. 물론 결점이 없을 수는 없다. 언젠가 교회학교에서 함께 일했던 전도사님 한 분께서 이 목사님과 함께 일하는 부교역자들이 몹시 불편해 한다는 이야기를 해서 놀란 일이 있었다. 이 목사님은 여느 분들과 달리 부교역자 생활을 하지 않으셨는데, 그래서 부교역자의 고충을 몰라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사람으로 살면서 범하는 실수가 목사님이라고 피해갈 일인가. 그렇기는 해도 말한 대로 살려고 애쓰고, 부족함을 인정하는 면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이 목사님을 스승으로 여기고 존경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목사님은 평생 동안 늘 자신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경계하셨고, 은퇴하실 때까지 그것을 잘 지켜내셨다. 어떤 경우라도 사람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아무도 지키지 않으며, 그 결과 교회는 오늘 이 모습까지 무너져 내렸다. 조금은 엉뚱한 이야기 하나. 자식이 성악가로서 예배 중에 드리는 찬양을 듣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요 자랑이다. 그러나 성악을 시작한 처음부터 예배당 한 가운데 서서 찬양을 드리지 못하게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어디 예배당 한복판에만 계시겠는가마는, 그 자리에 서다가 혹시나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 아니라 찬양 드리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들지나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온전히 이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나는 30호 가수를 잘 모른다. 물론 노래를 몇 번 들었지만 내 취향과 거리가 멀고, 과연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듯 그의 노래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지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설교 중에 들었던 네 형제의 이름 속에 그가 들어 있었고, (지금은 항암치료로 얼굴이 많이 달라지셨지만) 목사님을 빼다 박은 모습으로 그가 목사님의 아들인 것을 알겠다. 세간의 비평이 그러하듯 그의 노래가 그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평생 보고 배운 아버지의 모습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님의 선친도 아주 신앙이 깊으셨다고 했다. 목사님께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복 곱게 입고 방석 위에 단정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던 뒷모습만 떠오른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30호 가수인 그 청년의 기억에 들어있는 아버지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화제에 오르면서 덩달아 목사님께서 걸어오신 길이 조명을 받고 있다. 여러 기사가 났지만 삼십 년 넘게 스승으로 여기고 지켜봐온 목사님의 실체에 가장 가까운 글이어서 여러분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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