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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Feb 07. 2021

[사우디 이야기 33] 여성인권

사우디 이야기 (33)

언젠가 K팝을 좋아하는 사우디 여대생 두 명이 집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한국에 간 게 발각되어 한바탕 난리가 난 일이 있었다. 모든 여성은 보호자 허락이 있어야 여권(旅券)을 받을 수 있는데 어떻게 허락 없이 여행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몰래 후견인인 아버지 모바일로 접속해 여권발급에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후속 보도를 보지 못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여대생들이 돌아와 어떤 곤욕을 치렀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어떤 여의사가 런던에서 열리는 심장병 학회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후견인인 어린 아들이 게임에 빠져서 싫다는 답만 보내고 여권발급을 동의하지 않아서 참석이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례는 국제인권단체에서 사우디의 열악한 여성인권상태를 고발하면서 알려졌다.


이 두 사례 모두 지금으로부터 불과 5년도 안된 2016년 가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사우디 여성들이 소셜미디어에 ‘내가 내 후견인이다(#IamMyOwnGuardian)’, ‘남성 후견인 제도를 없애자(#TogetherTo EndMaleGuardianship)’, ‘사우디 여성의 노예화를 멈춰라(#StopEnslavingSaudiWomen)’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올려 눈길을 끌었다.


사우디의 모든 여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흐람(Mahram)’이라고 불리는 후견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결혼해서는 남편이, 남편이 죽고 나면 아들이 후견인이 된다. 결혼하기 전에 아버지가 죽으면 오빠나 남동생이 후견인을 이어받는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법도로 여겨오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글자 하나 다르지 않다. 그런 것이 사고방식이나 관습에 그치지 않고 실정법으로 최근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러니 여권 발급에 후견인의 동의가 필요한 것은 물론, 선거권도 없고 운전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이나 취직이야 중요한 일이니 그렇다고 쳐도 병원도 후견인 동의 없으면 갈 수 없다는 말엔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것뿐 아니다. 사우디 사회의 특별히 어두운 면 중 하나가 집안에서 발생하는 명예살인이다. 사우디는 국가 법률시스템의 토대를 이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슬람 규정에 따라 가족을 수치스럽게 하는 여성의 살인, 즉 명예살인을 허용했다고 한다. 이는 여성이 가족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명예살인이 합법적이라는 내용은 있는데 그것이 불법화되었다는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마 지금까지 그것이 합법적인 것일까 싶어 이를 과거형으로 표현했다. 이 내용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사우디라고 해서 처음부터 여성인권이 그렇게 무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시대 이전에는 여성을 노예와 살림도구가 아닌 대등한 반려자로 인정했다. 전사(戰士)나 지도자 외에도 폭넓고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슬람시대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았고 영향력도 작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인권은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점점 위축되었다. 그러다 사우디 건국 초기에 쿠란을 가부장적으로 해석해 남성들이 가족과 사회에서 여성의 행동을 통제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최근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사우디 여성들은 이전에는 결혼ㆍ취업ㆍ여권이나 신분증 발급ㆍ은행계좌 개설ㆍ수술할 때 후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비무슬림과 결혼이 불가능하고, 공공장소에서 아바야와 히잡으로 온몸을 감싸야 하고, 가족이 아닌 남성과의 대화가 금지되었다. 법정증언도 남성의 증언이 여성의 증언보다 우선으로 받아들여졌고, 부모 재산은 아들의 절반만 상속받았다.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이 중 몇몇 조항이 폐지되거나 개선되었다.


언젠가 이곳에 오래 사신 교민 한 분이 옛날 본인의 이까마(거주허가증)를 보여주신 일이 있는데, 놀랍게도 사람마다 이까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사진과 함께 각각의 인적사항을 표시한 것이었다. 이까마는 당연히 가장이 가지고 다녔을 것이니 여성이나 자녀는 신분증조차 없는 셈이었다. 외국인조차 이랬으니 자국 여성들에게 신분증을 따로 내어주지 않고 가장의 신분증에 인적사항만 함께 표시해서 신분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우디 여성들이 오랜 세월동안 잠잠히 견디고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사우디 여성들과 이웃으로 지내는 교민들이나 이들의 치료를 맡고 있는 한국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우디 여성들의 성정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고 한다. 이런 남성 절대 우위의 사회에서도 부인에게 쥐어 사는 남편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여성들도 법이 그러니 따르는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중에 이런 제도에 불만을 느끼고 그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왜 없었을까. 그러한 불만이 여성운동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운전의 자유를 요구한 움직임이다.


사우디 여성들이 운전의 자유를 요구한 움직임은 1991년 이라크 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시위까지 벌였지만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전통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실패로 끝났으며, 이 실패가 사우디 여성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2011년 북아프리카에서 아랍 민주화운동이 발생했을 때 사우디에서도 여성 인권운동이 다시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운전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다. 이후 2013년 운전의 자유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세 번째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의 전통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완강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여성 인권 개선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막 부임했던 2009년에 처음으로 여성이 교육부차관에 임명되었다고 해서 신문이 대서특필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같은 해 압둘라 국왕이 킹압둘라과학기술대학(KAUST)을 남녀공학으로 세웠다. 2015년에는 여성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당시 지방의회 선거에서 여성 유권자의 무려 80%가 투표에 참여했고 지방의회에 여성이 20명이나 의원으로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선거 당시 여성들이 참정권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여성에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보여주자며 소셜미디어로 선거참여를 독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2017년에 처음으로 후견인 제도의 일부를 개정해 여성이 후견인의 허락 없이도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허용했다.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데 후견인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개정조차도 사우디 정부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사우디가 여성유엔총회라고 여겨지는 유엔여성지위위원회(CSW, UN 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 위원국으로 선임되었는데, 이에 대해 사우디의 열악한 여성인권 상황을 이유로 국제적인 비난이 일자 이를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개정이 추진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18년에 들어서자 1월에 여성의 축구경기장 입장이 허용되었다. 이것이 무슨 대단한 일일까 생각했는데, 바로 2년 뒤 무려 24팀으로 이루어진 여성축구연맹전이 출범한 걸 보면 여성들이 축구에 대단한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6월부터 여성들이 그렇게 꿈꾸던 운전면허를 얻게 되었다. 여성운전허용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1년 정도 앞두고 정부에서 여성운전 허용방침을 발표했다. 여성운전을 허용하지 않은 이유가 여럿 있지만, 남녀가 유별한 곳이니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남성인 교통경찰이나 사고처리반(Najm)과 마주치는 게 문제가 된다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어떤 이슬람 종교지도자는 그것이 여성의 난소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다.


사실 사우디에 여성 운전을 금지하는 법률은 없었다. 단지 여성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지 않았고, 그래서 운전하는 여성을 무면허운전으로 단속한 것이다. 사우디 여성 중에는 외국에서 운전면허를 발급받은 이들도 많은데,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부임하고도 한동안 국제면허증이 허용된 것도 아니고 허용되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불안하게 운전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면허증을 허용하면 외국 운전면허를 가진 여성이 운전하더라도 단속할 명분이 없고, 허용하지 않자니 업무로 방문한 외국인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까닭에, 법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지만 남성이 국제면허증으로 운전할 경우 단속하지 않는 어정쩡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여성운전을 허용한다는 발표를 듣고 곧 시내교통이 엉망이 될 것으로 짐작했다. 처음에야 외국면허를 가진 여성들이 운전할 테니 별 무리가 없겠지만, 처음 운전하는 여성들이 쏟아져 나올 경우 교통이 엉망이 될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성 운전이 허용되고 한 달쯤 지나서야 운전하는 여성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고, 2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성운전자가 그다지 많지 않다. 면허발급 숫자로 여성운전자가 한꺼번에 늘어나지 않도록 조절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여성들은 자기 직업이 있을 경우에만 면허를 발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성취업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니 결국 외국인 여성은 면허 발급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여성교민 중에 운전면허를 얻은 분은 외교관과 지사장 말고는 아직 보지를 못했다.


이렇게 여성들을 옥죄던 후견인 제도는 2019년 8월에 개정되어 여성인권이 대폭 향상되었다. (이미 허용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허용했으니 향상되었다는 표현이 적절치 않은 감이 있기는 하다.) 여성 스스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으며, 혼인ㆍ이혼ㆍ출생ㆍ사망 신고를 할 수 있고, 가족관계 증명서를 신청할 수 있고, 미성년자를 대신해 가족의 대표가 될 수 있게 되었다. 55세이던 여성의 정년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60세로 연장되었고, 임신을 이유로 해고할 수 없고 출산휴가 180일을 의무화했다.


비록 여성인권이 이렇게 뒤떨어져있기는 하지만 이에 비해 교육 기회는 비교적 균등하게 주어졌다. 다른 나라보다 늦은 1960년에 처음으로 여성을 위한 교육이 시작되었지만 현재는 여학생이 전체 대학생의 58%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공과대학 같은 일부학과에서는 여학생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있으며, 졸업하는 여학생 중 단지 13% 정도만 취업이 된다. 최근에는 유학 다녀온 여성들이 컴퓨터 프로그래머ㆍ인테리어 디자이너ㆍ영화 제작자ㆍ예술가ㆍ엔지니어로 활동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축구ㆍ농구ㆍ배구ㆍ크리켓 선수로 활동하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다.


사우디는 석유 의존 경제를 탈피하기 위해 살만 국왕이 즉위한 이후 Vision 2030이라는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당연히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대폭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비록 이 정책이 여성인권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일단 여성 참여가 확대되면 여성인권은 자연적으로 향상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인권은 빠른 속도로 향상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거기에 바이든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에 대한 요구가 강화되고 있는 것도 이를 촉진시킬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왕실의 주역들도 비록 자의는 아니지만 그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나. 거기에 날로 확대되는 소셜미디어의 영향도 한 몫 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대중교통의 확산도 큰 몫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소셜미디어가 확대된다고 해도 온라인에서 결집된 힘과 오프라인에서 집단적으로 발산되는 힘이 같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사우디 여성들의 목소리가 결집된 힘으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대중교통이 갖춰져 있지 않아 여성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큰 이유일 것으로 생각했다. 넉넉한 집에서는 운전기사를 따로 두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결국은 후견인인 아버지나 남편이 태워 줘야 외출할 수 있는데,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모여 목소리를 낼 수 있겠나. 빠르면 올해 안으로 지하철과 시내버스 연계수송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이 언제든 원할 때 이동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니, 앞으로는 자유롭게 모일 수 있고, 모이다 보면 불만이 결집된 의견으로 터져 나올 것이고, 결국은 여성인권을 개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사회의 선의에 기대어 생업을 이어온 사람으로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또한 곧 그렇게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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