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Mar 01. 2021

[사우디 이야기 36] 구경거리

사우디 이야기 (36)

요즘이야 극장도 생기고 여기저기 축제도 생겼지만 십 년 전만 해도 도무지 구경거리가 없었다. 오죽하면 교통사고가 나면 경찰이 와서 해산시켜야 할 정도로 구경꾼들이 몰렸을까. 교통사고가 나면 사고 난 차선이 밀리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반대 차선도 구경하느라 아예 차를 세운 사람들이 많아 매한가지로 막혔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구경꾼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설마 예전보다 구경거리가 늘어서 그런 것일까?


대중교통도 없고 여성 출입마저 쉽지 않은 곳이다 보니 구경거리의 수요 자체가 적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곳은 정말 구경거리가 없다. 극장이나 공연장은 물론 동물원 식물원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리야드에 조그만 동물원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걸 동물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규모도 작고 보잘 것 없다. 찾아보니 식물원이라고 이름 붙은 것이 몇 개 확인되기는 하는데, 식물을 전시한 곳은 아니고 규모가 큰 정원에 레스토랑이나 카페 같은 상업시설이 들어선 것이 대부분이다.


지나다 보면 크고 작은 놀이동산들이 꽤 눈에 띈다. 이름 그대로 아이들이 놀만한 조금 큰 놀이터 정도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같은 규모에 견줄 수준은 아니다. 그저 우리나라 유원지에 있는 놀이동산 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아이가 없는 우리 또래 사람들은 갈 일이 없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쇼핑몰 안에 놀이기구가 있어 누가 아이들 데리고 뙤약볕 아래서 시간을 보내야하는 놀이동산을 찾을까 싶지만, 그런 상황 치고는 그 숫자가 적지 않다. 얼마 전에 지나다니는 길에 있던 놀이동산 두 곳을 모두 헐고 건물을 짓던데, 수익으로 따지자면 진즉 그랬어야 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아이스링크도 있고 Snow City라는 눈썰매장도 있다. 쇼핑몰 안에 있는 것으로, 눈썰매장은 슬로프가 50미터가 안 되고 아이스링크도 길이가 20미터를 넘지 않는다. 눈썰매장에 있는 아이스링크는 얼음을 얼린 것이지만, 다른 쇼핑몰에 있던 아이스링크는 플라스틱처럼 보였다. 언젠가 가보니 그나마도 없어졌다.


                                            <Othaim Mall에 있는 Snow City>


그런 가운데 시민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축제가 몇 있다. 1982년에 시작된 리야드 인근 민속마을에서 열리는 자나드리아(Janadriyah)와 건국기념일, 그리고 리야드 봄 축제가 있다.


자나드리아 축제는 전 압둘라 국왕이 왕세제 겸 국가방위군(National Guard) 사령관 시절에 자기 권력기반인 국가방위군을 위문하는 행사였다. 그러다가 2005년 압둘라 국왕이 즉위한 이후 사우디의 정통성과 연대감을 강화하는 행사로 변화했고, 2008년부터는 매년 주빈국을 선정해 해당국가의 문화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 행사는 리야드 동북쪽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자나드리아라는 지역에서 매년 2~3월에 열린다.


축제라고는 하지만 성격은 박람회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사방 1킬로미터가 안 되는 구역에 매년 주빈국으로 선정되는 나라의 전시관을 중심으로 주정부나 정부부처 또는 기업체에서 세운 전시관이 배치되어 있으며, 아울러 민속공예품 전시나 민속공연이 이루어진다. 물론 축제라면 빠져서는 안 되는 먹을거리도 잔뜩 있다.


주빈국은 터키(2008년)를 시작으로, 러시아(2009년), 프랑스(2010년), 일본(2011년)이 초청되었으며, 2012년에는 한국-사우디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되었다. 이 때 당시 이 대통령이 국빈방문으로 참석했다. 당시 대통령 참석행사라고 해서 리야드에서 일하던 주재원 대부분이 동원되었다. 자나드리아 행사는 국왕과 주빈국 국가수반이 참석한 가운데 인근에 있는 왕실 경마장에서 낙타경주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도 덕분에 사우디 국왕과 우리 대통령을 지척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 낙타경주를 한다는데 사람이 탄 것도 아니고 빠르지도 않은 낙타가 트랙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끝났다. 몇 시간 기다렸는데, 정작 경주는 채 십 분도 안 걸렸던 것 같다.


                                                  <Janadriyah Festival>


행사는 두 주 정도 열리는데 그 좁은 구역에 수백만 명이 몰렸으니 얼마나 혼잡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사우디 최대 행사라고 하고 마땅히 축제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 사람이 몰리는 게 당연하지만, 특별히 볼만한 것도 기억에 남는 것도 없어 다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관람일 중에 Family Day가 있어서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남성은 입장할 수가 없다. 겨울에 열리는 것이니 날씨야 더할 나위 없이 좋기는 하지만, 좁은 지역에 사람은 넘치고 정작 볼 것도 별로 없고 주차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서 가보라고 추천할 생각은 별로 없다.


사우디 건국기념일은 9월 23일이다. 이 날은 시내 나갈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사방에 국기를 온 몸에 휘감은 청년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이 2002년 월드컵을 방불케 한다. 차창 밖으로 몸을 내놓은 사람, 차 위에 올라간 사람, 차를 붙들고 함께 뛰는 사람. 몰려다니며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고. 그런데 노래 부르는 건 못 본 것 같다. 밤 아홉 시쯤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 시간이 되면 축제의 절정을 이루는데, 신문에서는 며칠 전부터 불꽃놀이가 열리는 장소를 알린다.


언젠가 한 번은 건국기념일 생각을 못하고 시내에 나갔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꼬박 두 시간을 도로에 갇혔던 일도 있다. 그저 빨리 빠져나갈 생각에 얼른 불꽃놀이가 시작되기만 기다렸는데, 세상에 불꽃놀이가 벌어진다는 곳에 있었는데도 오 분 남짓 소리만 듣고 제대로 된 불꽃은 보지도 못했다. 아마 이 사람들은 여의도 불꽃축제는 그만두고 그저 어지간한 대학 축제 때 벌어지는 불꽃놀이만 봐도 기절하지 않을까 싶다. 그때는 어이 없어했는데 구경거리 없는 사우디에 오래 살다 보니 나중에 그거라도 보겠다고 나가게 되었다. 작년엔가 아내와 구경하겠다고 나가서는 그 생각이 나서 둘이서 한참 웃었다.


리야드에 봄 축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꽃 전시회인 모양인데 가보지는 않았다. 재작년부터는 도심 인근에 Winter Wonderland라는 겨울축제 행사장이 생겼다. 리야드 순환도로 Exit 4에 있는 금융단지 인근 공터에 들어선 것이니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사우디에서 본 어떤 놀이동산보다 다양했다. 젊은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꽤 많이 다녀온 모양이다. 우리야 뭐.


놀라운 것은 이 Winter Wonderland가 사우디 연예청(General Entertainment Authority)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살만 국왕이 즉위하고 나서부터 (실질적으로는 왕세자가) 여러 개방정책을 펼쳤는데, 그 일환으로 2016년 연예청을 설립해 매년 자국민들이 해외에서 소비하는 220억 달러 규모의 비용을 국내에서 소화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연예청에서는 국가 재정으로 테마파크를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 연예청 말고도 문화청이 따로 있는데, 아마 문화부 휘하의 기관이 아닌가 싶다.


                                             <Winter Wonderland>


왕세자가 삼성이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혀 눈길을 끈 키디야(Qiddyia)는 사우디 국부펀드(PIF) 주도로 리야드 외곽에 서울시의 절반이 넘는 면적(334km2)에 건설하는 종합레저타운이다. 이 사업 역시 사우디 국가개조사업인 Vision 2030에 포함된 개방정책의 일환이지만 그보다는 해외에서 소비되는 관광비용을 국내로 끌어들이자는 국가 포트폴리오 다변화 목적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왕세자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의 경향을 볼 때 이곳에 공원이나 리조트와 함께 건설될 놀이동산은 지금까지 사우디에 있었던 어떤 시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탈중동급 세계수준의 시설이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Qiddyia 조감도>


정부에서 이미 F1 Formula 경주와 함께 사우디 다카르 랠리도 유치했고 국민의 레저활동을 전담할 연예청까지 만들어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으니 구경거리가 없는 사우디라는 평가는 조만간 옛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왕세자가 자신의 전부를 걸다시피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네옴 신도시나 홍해 휴양도시까지 완성되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나라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기대된다. 물론 거기까지 도달하기에는 극복해야할 험난한 고비가 한둘이 아니다. 우선 천문학적인 재원을 마련하는 일도 그렇고, 관광객을 유치하자면 이슬람과 관련한 술ㆍ음식ㆍ복장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할 것인데 과연 종교계나 보수층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문제이다.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결국은 두바이로 몰리는 관광수요를 나누는 셈이 될 텐데, 그 수요 가지고 수지를 맞출 수 있을지 두바이와의 관계 경색을 어떻게 풀 것인지도 걱정스럽다. (두바이와 경쟁관계가 되면 GCC도 결국 해체되지 않을까?)


이 모든 계획이 2030년을 목표로 삼고 추진되고 있으니 조만간 그 성과가 하나둘씩 눈에 보일 것이다. 처음부터 강한 왕은 없다. 또한 왕좌에 오래 앉은 왕 치고 약한 왕도 없다. 지금 왕세자 나이로 봐서 별 문제가 없다면 최소한 30~40년은 왕좌에 앉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십 년만 지나도 그 위상은 국내용이 아니라 국제용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당장 미국에서 카슈끄지 보고서를 발표하고도 정작 왕세자는 제재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까지 내가 이곳에 있을 리는 없으니 상전벽해가 될 그 모습을 볼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선의에 기대어 십 년 넘게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니 계획한 대로 좀 더 개방되고 좀 더 인권이 존중받는 나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이들의 존재 근원인 이슬람도 잘 지켜가야겠지만 다른 종교에도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산유국으로서 지금과 같은 위상을 앞으로 더 얼마나 유지할지 알 수 없지만 이 많은 일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국민 부담이 그만큼 늘어야 할 것인데, 훗날 큰 이익으로 돌아올지라도 세금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국민들이 이를 감당하는 일이 당장은 쉽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이 잘 감당하도록 설득하고 속도를 잘 조정해서 국가를 잘 이끌어나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훗날 기회가 된다면 그 모습을 보러 다시 한 번 리야드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우디 이야기 35] 세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