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Apr 04. 2021

[사우디 이야기 43] 병원

사우디 이야기 (43)

부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가 아파서 치과를 찾았다. 사무실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를 비롯한 모든 의료진이 여성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었고 현지 여성과 대화는커녕 마주 설 일조차 없었던 내게는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아주 친절했고 잘 마무리된 것 같아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한국에 휴가 가서 치과에 들르니 어디서 치료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엉망으로 치료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곳은 의료보험회사가 여럿이고 보험에도 등급이 여럿 있어서 해당되는 병원이 모두 다르다. 의료보험이야 회사에서 가입하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정작 병원 갈 일이 생겨서 챙기다 보니 갈 수 있는 병원이 얼마 되지 않았다. 거주허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장 낮은 등급으로 보험을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해에 상위등급으로 변경하기는 했지만, 아파도 등급 때문에 필요한 의료를 누릴 수 없다는 게 당황스러웠다. 하긴 우리나라도 수술보증금을 내야 수술해주던 때가 있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의료복지는 참 대단한 수준이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교민들은 거주허가 갱신에 필요한 최소한의 등급으로 보험을 가입하는데, 그 중에는 거주허가 갱신요건만 충족하고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는 보험도 있다고 한다. 보험료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어차피 입원하거나 수술해야할 상황에는 모두 한국에 가서 치료받으니 굳이 이중으로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민들이 이곳 의료시설을 기피하는 이유는 꼭 비용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이곳의 의료수준을 신뢰하지 못하기도 하고 언어소통도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사실 병원에 가서 우리말로 증상을 설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영어로 표현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언젠가 귀에 뭐가 들어갔는지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병원에 가기 전에 사전에서 필요한 표현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걸 찾지 못했다. 그렇게 병원에 가서 생각나는 대로 설명하니 의사가 “귀가 block되었느냐”고 묻더라.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생각해보면 찾지 못할 말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런 사소한 불편도 영어로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증상을 설명하려면 얼마나 아득하겠나. 설령 그렇게 표현한다고 해도 그게 의사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등급이 낮은 의료보험이라고 해서 해당 보험에서 허용하는 병원만 이용하고 다른 병원은 이용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른 병원을 이용할 경우 먼저 치료비를 지불한 후 그것을 자기가 가입한 보험회사에 신청하는 절차가 있기는 하다. 다만 전액을 지불하는 건 아니고, 각 보험회사가 자체적으로 세워놓은 진료수가 기준을 따른다. 혹시나 싶어 이런 절차가 있는 건 확인했지만 그 절차를 따라 신청해본 일이 없어서 그런 신청이 제대로 받아들여지는지, 비용은 얼마나 보전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병원 접수창구에서 그럴 경우 보험회사에서 지불하는 금액이 대체로 실제 지불한 비용보다 상당히 적을 거라는 설명은 들었다.


지금 아내와 내가 가입한 모험은 연 5백만 원 정도이다.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이곳은 인원대로 보험을 들기 때문에 부양가족이 몇 명이냐에 따라 보험료가 다르다. 4인 가족이면 이보다 50% 정도는 많지 않을까 싶다. 같은 조건으로 아래 등급으로 가입하면 보험료가 1/3 이하로 내려간다.


이곳은 모든 병원이 예약제로 운영된다. 병원에서 직접 접수하려고 하면 예약해야 한다고 받아주지를 않는다. 예약이 꽉 차 있는 게 아닐 때도 도무지 융통성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가 겪은 게 그렇다는 것이고, 모든 병원이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진료과목에 따라 접수하기 전에 보험회사에 승인을 받아야 되는 경우도 있다. 종합병원에서 치과 진료를 받은 일이 있는데, 전화로 예약하려 하니 먼저 보험회사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며 보험정보를 요구했다. (이곳에서 치과 외에 내과ㆍ이비인후과ㆍ정형외과ㆍ비뇨기과ㆍ산부인과ㆍ내분비과를 이용했는데 사전에 보험회사 승인을 요한 건 치과뿐이다.) 진료 도중 수가가 높은 진단이나 검사가 필요한 경우에도 사전에 보험회사 승인을 받아야 한다. 아내가 어깨가 아파서 진료를 받으니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한다며 MRI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뭐 그만 일에 MRI 검사까지 받아야 하나 싶었지만 보험회사 승인을 받으면 검사비가 아주 작다고 했다. 아마 1만5천 원 정도 냈던 것 같다.


이곳은 병원을 의원ㆍ병원ㆍ3차 병원 등 3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다. 의원과 병원은 민간의료기관이고 3차 병원은 국립의료기관이다. 3차 병원은 의원이나 병원에서 상급병원으로 전원요청을 해야 이용할 수 있다. 국립의료기관은 내국인에게는 무료인데 반해 외국인은 유료이며, 물론 의료보험을 이용할 수 있다. 의료폐기물 문제 때문에 리야드에 있는 병원 꽤 여러 곳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때 느낌으로는 3차 병원이 꼭 전원요청이 있어야만 이용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시 외국인 환자는 보지 못해서 내국인만 이용할 수 있는 줄 알았지만 그곳에 근무하는 교민이 있어 물어보니 1ㆍ2차 병원에서 전원요청을 하면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병원에서 사우디 의사를 만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집트ㆍ요르단ㆍ레바논과 같은 중동국가 출신, 또는 인도ㆍ파키스탄 출신 의사들이 대부분이다. 모두들 영어를 불편하지 않게 사용해서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일은 없다. 사우디에는 1967년 킹사우드대학(리야드)에 의과대학이 설립된 이래 1975년 킹압둘아지즈대학(제다)ㆍ킹파이잘대학(담맘), 1982년 킹칼리드대학(아브하)에 의과대학이 설립되었고, 2000년 이후에 16개 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비록 의과대학 대다수가 최근에 설립되었고 의학교육과정이 길고 임상경험을 쌓는데 또 그만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배출된 의사가 많지 않기는 하겠다. 하지만 3,500만 인구에 의과대학이 스무 개가 넘는다면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닌데 왜 병원에서 사우디 의사를 보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물론 자국민이 이용하는 국립병원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민간병원에서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건 의아하다.



이곳 병원 간호사들은 필리핀 출신이 무척 많다. 몇 년 전부터 한국간호사들도 조금씩 늘어 이제는 리야드만 해도 수십 명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필리핀 간호사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부임 초기에 병원엘 가니 필리핀 간호사들이 우리나라 가수며 탤런트 이름을 대면서 아주 친절하게 맞아줘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곤 했다. 그들 때문에 그런 탤런트가 있는 줄 알게 된 일도 있다. 요즘엔 K팝 가수들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어 가는 곳마다 물어보는데, 내가 도무지 아는 게 없으니 어떤 때는 말 시킬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가능한 간호사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곳 의사들은 대우가 영 우리만 못한 모양이다. 우리 의료진이 받는 대우보다 훨씬 낮은 것 같고, 어쩌면 절반이나 될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진료를 받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언젠가 전립선 질환 치료 받으러 갔다가 보기 드문 사우디 의사 한 사람을 만났는데, 여기서는 어려우니 휴가 때 한국에 가서 치료받는 게 낫겠다고 조언하더라. 다른 진료과목도 그렇고 아내가 진료 받을 때도 의사가 한국 가서 치료받으라고 권하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의사 스스로 그렇게 이야기 한다.


가까이 지내던 후배 지사장 하나가 급성복막염이 걸려 수술을 받은 일이 있다. 좋은 병원에서 수술을 잘 받고 퇴원했는데 하루 지나고 나서 통증이 하도 심해서 다시 병원에 갔더니 정작 수술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곳을 수술한 것으로 밝혀졌다. 재수술을 받고도 제대로 처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결국 네 번 수술 받았고, 두 달 가까이 그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이 아주 반쪽이 되었다. 처음 입원했을 때부터 지켜봐서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잘 안다. 결국 그렇게 된 그 친구는 겨우 걸을 정도까지 회복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갔고, 회복하는데 몇 달이 더 걸렸다. 이곳 교민들이 이곳 병원에 몸을 맡기면 안 된다며 굳이 한국 병원을 가려 했던 이유를 그때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이 하나가 깨져 고생하면서도 한국 휴가 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응급조치를 하고 한국 가서 제대로 치료받을 생각도 해봤는데, 자칫 더 큰 고생할까봐 미련스럽게 참고 있다.


이렇게 의료 수준이 걱정할 지경이지만 시설은 우리보다 훨씬 낫지 싶다. 병원 건물이며 시설이 그렇고, 입원실도 우리처럼 여러 환자가 방을 나누어 쓰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아주 어려운 사람들이 이용하는 병원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 문병 가보면 모든 입원실이 독실이고 꽤 넓다. 한국에서는 독실에 입원한 환자를 병문안 가본 기억도 별로 없는데.


이곳 의료시스템은 한국에 비해 상당히 뒤져있었는데 2015년 분당서울대학교병원과 SK텔레콤 컨소시엄이 개발한 의료정보시스템이 킹압둘아지즈병원을 비롯한 몇몇 국립병원에 설치되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이곳에 진출한 한국 의료장비업체가 입원수속부터 환자등록까지 일관하는 키오스크 시스템을 개발해 납품하기도 하는 등 시스템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렇기는 해도 정작 중요한 의료진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징후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우디 이야기 42] 자동차 운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