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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09. 2021

[사우디 이야기 44] 온라인시스템

사우디 이야기 (44)

부임 당시 이곳의 인터넷 속도는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인터넷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살았다. 어느 날 보니 인터넷 속도가 한국에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까지 향상되었고, 의식하지 못한 새 온라인시스템이 생활 곳곳에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임하기 전에 한국에서 인터넷뱅킹에 접속하려면 보안카드를 사용해야 했다. 나는 지금도 보안카드를 사용해 한국 인터넷뱅킹에 접속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보안카드 말고 다른 방식으로 접속이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언제부터 사우디 온라인뱅킹이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아무튼 온라인뱅킹이 시작될 때부터 문자로 보내주는 일회용 비밀번호를 사용해 접속하고 있다. 보안카드를 가지고 다닐 필요도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해킹 위험도 덜해서 이 방식이 더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인터넷 환경이 뒤쳐져서 오히려 중간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초에 회사에서 자료전산화 추진팀을 맡은 일이 있었다. 설계라는 것은 대부분 기존의 설계내용을 참고해 이를 수정ㆍ개선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그러다 보니 자료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원가가 좌우되었다. 설계 자료를 활용하기 쉽도록 분야별ㆍ유형별로 잘 분류해놓으면 투입인력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앞서가는 몇몇 설계회사에서는 마이크로필름으로 자료를 관리하고 있어 우리도 그 방식을 도입할 생각으로 담당자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그 방식은 이미 뒤쳐진 것이니 새로 나온 스캔 방식을 사용하라고 조언했다. 자기네들은 이미 마이크로필름 시스템에 너무 많은 걸 의존하고 있어서 섣불리 방향을 바꿀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스캔 방식을 도입했고, 그 후로 상당기간동안 자료 활용도에서 선두그룹에 들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우디는 인터넷 환경이 더디게 구축되었지만 그 덕택에 몇 단계를 건너뛰고 오히려 인터넷 선진국을 추월하게 되었다. 거기에 왕정국가라는 특징이 더해져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개인정보까지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온라인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코로나 사태에 성공적으로 맞선 K-방역은 초기에 사생활 침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서구인들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긴 감염자 추적시스템이 사생활을 침해하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가능했던 건 국가를 위해 사생활이 유보되는 것을 당연히 여겼던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곳사람들은 이삼십 년 전에 우리가 가졌던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보다도 더 국가주의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은 왕정국가 특유의 폐쇄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정부는 거의 모든 개인정보를 정부 시스템에 등록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최근 들어 코로나 사태를 명분으로 이런저런 모바일앱을 만들어 등록 정보를 계속 늘려가고 있다. 개인정보가 한 곳에 모여 있으면 그곳에서 클릭 몇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하지만 한 곳에 모여 있기 때문에 그곳이 뚫리면 치명적인 문제가 일어날 수 있고,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이를 악용한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정부가 이를 악용하더라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의를 제기할 시민사회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정부의 Absher System에 개인정보를, National Address Registration System에 주소를 등록해야 한다. 처음에는 의무가 아니었음에도 편의성 때문에 온라인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용자가 늘어났다. 그러다가 차츰 요구하는 정보가 늘어났고, 이제는 그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외국인의 경우 매년 거주허가 갱신이 불가능하도록 제도가 강화되었다. (거주허가는 1년짜리여서 매년 갱신해야 한다.)


Absher System은 거주허가를 받은 본인 명의로만 계정을 만들 수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취업비자로 입국한 ‘본인’과 그 ‘가족’으로 나뉜다. 가족의 스폰서는 취업한 본인이고, 본인의 스폰서는 그를 고용한 기업이나 사우디인이다.) 본인 계정 안에는 본인과 가족의 인적사항ㆍ개인정보ㆍ체류자격ㆍ주택임대상황ㆍ운전면허ㆍ보유차량ㆍ교통위반ㆍ교통사고ㆍ범죄이력이 모두 들어있다. 이 시스템에서 가족에 대한 비자를 발급할 수 있고, 본인과 가족의 출생ㆍ사망ㆍ결혼ㆍ이혼을 신고하고 운전면허증ㆍ차량등록증을 갱신할 수 있으며, 교통범칙금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민원업무 때문에 관공서를 방문하려고 하면 반드시 여기서 예약을 해야 한다. (민원업무를 취급하는 모든 관공서 방문 예약이 가능하다.)


이곳에 살면서 가장 불편한 것 중 하나가 출국할 때마다 출국ㆍ재입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자가 없으면 여권을 가지고 있어도 출국할 수 없다. 그런데 모든 개인정보를 연동시켜놔서 거주허가를 갱신하지 못할 경우는 물론, 납부하지 않은 범칙금이 있거나, 소송에 피소될 경우 출국ㆍ재입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다. 또한 거주허가 기간이 만료되는 즉시 모든 금융거래가 정지된다. 은행 입출금은 물론 신용카드나 현금카드 사용도 정지된다. 계좌에 돈이 있어도 찾을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National Address Registration System은 한 집에 한 가족만 등록할 수 있다. 이 시스템 운영을 시작할 때는 이미 모든 건물에 주소가 부여되어 있었는데, 주소는 자기가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모바일앱이 사용자의 위치를 찾으면 그것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등록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해당 주소 위치에서만 등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작년 코로나 통행금지 당시 거주지 인근에 한해 생필품 구매를 위한 외출을 허용했는데, 이때 이 시스템에 등록된 인적사항과 주소를 출력해 경찰이 요구할 경우 제시하도록 했다.)


최근에 Absher System 등록 정보에 주택임대상황이 추가되었다. 외국인은 부동산 소유가 불가능하니 어떤 형태로든 임대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부동산중개소에서 이 시스템에 임대차계약 내용을 등록하고 임대인과 임차인이 접속해 이를 확인하면 임대계약이 성립하도록 만들었다. 얼마 전에 앞으로 임대계약이 없으면 거주허가를 갱신해주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내용은 복수의 사우디인에게서 확인한 것이다. 이미 시행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어디서도 그런 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내가 사는 집은 임차인이 내가 아니라 법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니 이를 대체하는 절차를 따로 만들지 않을까 싶다.) 이와 같은 Absher System과 주소등록시스템을 각각 놓고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시스템을 결합하면 임대계약을 체결한 집에서 살지 않는 외국인은 거주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여럿이 한 집을 나누어 쓰는 저임금노동자들은 더 이상 합법적으로 머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이런 규제 대부분은 외국인에게만 해당되는데 그 강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높아진다.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외국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모양이 되었다. 앞선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외국인근로자가 본국에 보내는 급여송금액이 작년에 40조 원을 넘겼다. 사우디 정부 연 예산이 300조 원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이다. 그래서 사우디 정부에서는 자국민에게는 소득세를 걷을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외국인에게는 급여송금액에 (세금이 되었든 요금이 되었든) 과세하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언론에 흘린다. (여태까지 “과세를 검토한다”는 기사는 보도된 일이 없고, “과세를 검토한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는 기사는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Absher System



Sehaty; 코로나 검사 신청, 코로나 백신 신청 및 접종상태,  코로나 발생 신고


Tawakkalna; 코로나 감염여부ㆍ백신접종상태ㆍ검사 신청ㆍQR코드ㆍ백신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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