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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20. 2021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1 자책골, 1 어시스트

김혼비

민음사

2018년 6월


여자축구


사우디는 여성인권이 열악하기로 유명하다. 최근까지 여성운전이 허용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였다가 2018년에서야 비로소 그 족쇄를 풀었다. 여성은 운전 뿐 아니라 경기 관람도 불가능했는데, 여성운전을 허용한 그해 경기 관람도 허용했다. 놀라운 것은 여성의 경기 관람을 허용한 두 해 뒤 무려 24팀으로 이루어진 여성축구연맹전이 출범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인권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우디에 견줄 정도까지는 아니다. 우리나라에 여자축구팀이 생긴 것은 1949년이고, 1990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여자축구팀이 창단되고 국가대표팀도 구성되었다. 그런 짧지 않은 역사에도 팀은 1990년 당시 숫자인 여덟 팀에서 더 늘어나지 않았다. 사우디야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나라이니 팀을 만드는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24팀이나 만들려면 무엇보다 선수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변이 우리보다 넓어야 하는데, 최근에야 여학생 교과목에 체육을 넣을 수 있게 된 나라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시즌을 뛰면서 1골(자책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저자는 우리나라에도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축구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이렇게 열심히 축구를 하는데 왜 그동안 남자 조기축구 선수들만 눈에 띄었던지 의아해한다. (책대로라면 저자가 지금도 축구를 계속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책에는 두 시즌에 대한 기록밖에 없다.) 나도 지소연이나 이민아 정도는 알지만, 고백하건대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해보기까지 여자축구팀이 ‘여덟이나!’ 되는 줄 몰랐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축구를 엄청나게 하는” 줄은 더욱 몰랐다. 하지만 여학생에게는 체육도 가르치지 않는 사우디에조차 축구를 꿈꾸던 여성이 그렇게 많았을 정도로 축구가 매력적이라면 우리나라에 축구를 즐기는 여성동호인이 겨우 그 정도인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저자가 경기하면서 오며 가며 마주쳤던 많은 선수들 중에 정작 축구 팬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가대표 축구에도 해외축구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고, 심지어 축구팀에 들어오기 전에는 축구 규칙도 전혀 몰랐다는 사람이 태반이었단다. 사실 나도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해결되는 줄 알지 규칙은 잘 모른다. 규칙이 필요한 축구를 해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축구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내게 축구는 분위기에 휩쓸려 보는 경기이지 흥미있어서 보는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뭉쳐야 찬다’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비로소 알게 된 규칙도 많다.


저자는 그런 경기를 왜 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다만 책머리에 팀 부동의 주전 풀백이 한 말을 공감해 인용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아, 저자가 나이가 먹었구나 하고.


“나이 먹으면 취향이 변하는 게 맞나봐. 난 원래 운동하는 거 질색했는데.”


축구는 아저씨 운동이라는 통념


마흔을 갓 넘어서 회사에서 쓰러진 일이 있었다.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 결과였다.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서 검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식보다도 어린 아이들과 함께 배웠다. 조금 나아지니 관장께서 여성들과 함께 운동하도록 했다. 막 중학교 진학한 여학생에게, 가냘파 보이는 애기 엄마에게 원 없이 깨졌다. 어느 날 조폭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새로 들어왔는데 운동 좀 했는지 꽤나 거들먹댔다. 나를 들고 깨는 걸 재미로 알았던 여학생하고 애기 엄마 시켜서 한 주일쯤 혼을 빼놨더니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호구 싸들고 사라졌다. (검도는 성별이나 나이, 체급에 관계없이 맞붙는다. 나를 밥으로 여기던 애기 엄마는 체중이 내 반도 안 나갔다.)


여성의 운동능력이 남자만 못하다는 게 통념이라고? 굳이 여성과 겨루어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탁구ㆍ양궁에서 시작해 핸드볼ㆍ배구ㆍ농구와 같은 구기종목, 최근의 골프에 이르기까지 국제대회에서 거둔 여성스포츠 성적은 남성을 압도한다. 빙상으로 오면 또 어떤가. 쇼트트랙ㆍ피겨ㆍ스피드 스케이팅까지 떠오르는 남자선수가 얼마나 되는가. 축구를 봐도 그렇다. 남자축구는 2002년 기적과 같은 성적을 기록한 바 있지만, 대체적인 수준은 세계 210개국 중 30~40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가 그토록 분개해마지 않는 홀대받는 여자축구는 세계 142개국 중 20위권을 벗어난 일이 없고 작년 말 현재 세계 18위를 차지하고 있다. 투자비용 대비 성과로 말하자면 남자스포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중고등학교에 올라갔을 때 여학생들에게 배구ㆍ핸드볼ㆍ농구는 실기시험 종목에 포함되었지만 축구는 선택지에 없었다고 말한다. 성인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는데, 몸매를 다듬고 필요한 근육을 붙이는 운동,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유용한 고급스러운 운동, 강하게 단련할 목적의 터프한 운동은 있어도 역시 축구는 선택지에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니고 애매해서일까? 저자는 몸매를 다듬을 수도 없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지도 못하고, 호신용 기술도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짐작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축구에 배어있는 아저씨 냄새 때문이 아닐까 묻는다.


저자는 “아저씨들은 눈앞의 여자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가 아무리 축구를 오래 봐왔다고 해도 꼭 가르치려 든다. 질문공세를 펼치기도 한다. 축구를 주제로 한 심층적인 대화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감히 남자의 영역에 겁 없이 들어온 이 여자가 대체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알고 들어왔는지, 진짜로 들어와 있기는 한 건지 호구조사를 벌인다. 그리고 주말에 축구하고 있으면 남편 점심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서 “불쾌함의 원인이 성 역할을 나누는 고루한 사회적 통념에서 나온 걸 생각하면 이건 세상이 구획해놓은 영역과의 신경전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위에서 여성의 운동능력에 남자만 못하다는 통념은 옳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는 축구가 남자의 영역이라는 통념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로서는 “축구는 남자의 영역이다”는 틀린 말이지만 과거에는 “축구는 남자의 영역이었다”는 맞는 말 아닌가? 통념은 통념일 뿐 진실도 아니고 가치도 아니다. 그래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 생각은 상황에 따라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니 통념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차라리 “남녀는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가치에 어긋난 것이나 바꿔야 한다”고 말해야 하리라.


Mansplain


2014년 출간된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책의 핵심 키워드인 ‘맨스플레인(mansplain)’은 2010년 뉴욕타임스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고 2014년 온라인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뜨거운 단어이다. ‘남자의 설명’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남자들의 설명 모두를 싸잡아 일컫는 건 아니고 “여자가 설마 이런 걸 알겠어? 당신은 여자니까 모를 것이다.”라는 ‘젠더적 편견에서 비롯된 오만과 무시가 깔린 설명’을 말한다.


내 이성으로도 ‘맨스플레인’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전후 세대로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아래서 자라고 살아왔으니 나도 그들과 다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일전에 쓴 저자의 <아무튼, 술>의 서평도 써놓고 보니 여기저기 편견의 흔적이 있어 여러 곳을 고쳤다. (고쳤어도 지적할 곳은 남았을 것이다. 그게 내 한계이고)


저자의 <아무튼, 술>에 시선이 끌린 것은 통념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통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저자의 나이였지 성별이 아니었다고 구차하게 사족을 달아놓은 것이 그 흔적 중 하나이다. 물론 술의 오묘한 세계를 거론한 저자가 젊은 사람인 것도 통념에 어긋난 것이었지만, 솔직히 저자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책을 사볼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글에서 고백한 대로 “어디 보자”하는 마음이었다.


지난 지자체장 보궐선거로 페미니즘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우선 난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모른다. 그것 가지고 사방에서 피터지게 싸우니 말 한 마디 거들기가 두렵다. 조심스럽지만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는 페미니즘을 ‘성별에 관계없이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믿음(the belief in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equality of the sexes)’을 뜻한다고 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성별에 관계없이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남녀에 관계없이’라고 해석했지만 브리태니커는 분명하게 ‘성별에 관계없이’라고 썼다. 이 둘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남성은 꾸준히 여성을 억압해왔고, 그로 인해 세상은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하다못해 성경조차도 남녀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해석을 지지하고 그렇게 믿는다. 수시로 내 자신을 돌아보고 허접한 글 하나를 쓸 때도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스며든 것은 아닌지 살핀다. 그래도 내 모습 중에, 내 글 중에 그런 생각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하다. 하지만 성 불평등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우리 삶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특별한 각오 없이 시정되기를 기대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혹자는 50:50의 기계적인 평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깊이 뿌리내린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여성우대로 여겨질 수 있는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삶에 깊이 뿌리내린 모습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일시적인 여성우대조차 불평등이라는 남성의 지적도, 고치려고 하는 데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옛 모습에 난감해하는 것조차 나무라는 여성의 지적도 당분간은 미뤄두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축구에서 깨닫는 지혜


저자는 ‘축구인’끼리 관계가 소원해지면 가장 먼저 패스에 민감해진다고 말한다. 미우니까 패스를 안 줘야지라는 유치한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라 일단 눈이 잘 안 마주쳐지니까, 힐끗이라도 서로 봐야 줄 준비도 하고 받을 준비도 할 텐데 눈 마주치는 게 평소 같지 않으니까 패스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아주 불편한 동료가 하나 있었다. 참다못해 언성을 높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마주치기 싫으니 그쪽으로 가지도 말고 아예 그쪽을 쳐다보지도 말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운신할 공간이 반으로 줄었다. 그걸 견디지 못하는 내가 매번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사과하고 나도 공간이 넓혀지는 건 아니었다. 내심까지 사과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는 업무로 연결되어 있어 외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개인적인 감정이 업무에 연결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돌아보니 그와 함께 한 일은 언제나 소란스러웠다. ‘축구인’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그렇게 모든 관계는 성과를 결정짓는다.


저자가 자랑스러워하는 어시스트 기록은 ‘뻥 축구’의 산물이었다. 상대의 수비를 돌파하고 동료에게 정확하게 패스를 찔러주고 드리볼로 착착 공을 몰고 가서 전방 공격수까지 무사히 공을 전달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차라리 모든 과정을 뛰어넘어 ‘뻥 볼’을 멀리 차놓고 그 뒤처리를 잘하는 선수들에게 맡기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감독의 지론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실력이 좋은 팀은 가능한 변수가 적게 작용하는 쪽으로 작전을 짜고 실력이 뒤진 팀은 요행이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작전을 짜는 건 승부의 ABC이다. 감독은 실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고, 요행이 작용할 여지가 많은 전술인 ‘뻥 축구’를 선택했고, 그것이 운 좋게 맞아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무려 어시스트’가 빛 바래는 것은 아니다.


기대, 그리고 궁금증


내게는 이 책이 저자의 두 번째 책이다. 방송으로 들은 것과 책 두 권을 통해 느낀 것이 저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전부이다. <아무튼, 술>이나 이 책은 재미로 읽을 만하다. 그러나 <아무튼, 술>과는 달리 이 책 이곳저곳에 저자의 본래 색깔이 언뜻언뜻 비치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부재가 누군가에게 미안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강자라는 것을, 미안할 수 없는 누구도 그 미안함이 필요 없는 입장도 어딘가에는 늘 있다.”는 글에서도, “초보자들은 공(점)만 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선수의 동선(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한 발 더 나아가면 그 선들이 변이 되어 만들어 내는 공간(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는 글에서도. 그래서 그의 글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그가 최근에 냈다는 <전국축제자랑>도 앞선 두 책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언제쯤 그의 본래 색깔을 드러낸 글을 읽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물론 내가 넘겨짚은 것일 수 있다.


나는 저자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선수 이름을 가져다 자기 이름을 삼은 줄 알았다. 어차피 프리미어 선수 중에 이름을 알만한 이가 열 손가락 꼽기도 바쁘니 그런가보다 했다. 그래도 저자의 책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어느 선수 이름을 가져다 썼는지 정도는 확인하는 게 예의일 것 같아 찾아보니 뜻밖에도 선수가 아니라 아스날 팀의 광팬이었다. 그런데 방송을 들으면서는 그걸 나만 모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자는 왜 목소리만 들려주고 얼굴은 그렇게 꼭꼭 감추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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