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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07. 2021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글쓰기 지침

이강용

도서출판 유유

2015년 6월


번역은 외국어에 능통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번역이란 출발어(出發語)를 도착어(到着語)로 잘 전달해야 하는 일이니 외국어 뿐 아니라 우리말에 능통해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서를 읽다보면 차라리 원저를 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설마하니 번역자가 무슨 말인지 모르고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필경 그의 우리말 실력이 필요한 만큼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겠다. (개중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 저자도 첫머리에 같은 생각을 밝히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번역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한국어 표현을 더욱 섬세하게 익히는 일이다. 역자 주석이나 해설 없이 유려한 한국어 문장으로 옮긴 본문만으로 독자를 이해시킨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번역은 외국어 실력에서 시작하여 한국어 실력에서 완성된다.”


나는 번역서를 읽기도 하지만 업무상 번역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때마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래서 참고할 요량으로 번역 전문가들이 발간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번역 전반에 대한 내용보다는 특정한 문장과 단어를 어떻게 표현하는 게 원서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물론 그것도 크게 도움이 된다. 하지만 번역에 임하는 자세나 원칙 같은 것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 않아 아쉬웠다. 그러는 중에 이 책을 만났다.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스스로 ‘외국어 실력을 키우는 번역 교재가 아니라 좋은 글을 판별하고 훌륭한 한국어 표현을 구사하는 태도를 길러주는 문장 교재’라고 소개하고 있다. 읽다 보니 과연 그럴 뿐 아니라 글쓰기 전반에 대한 귀한 지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먼저 번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번역이란 단지 출발어를 도착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일 뿐 아니라 외국어 투 표현을 더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으로 바루는 일이라든지 전문 영역의 용어를 교양 영역의 용어로 바꾸는 과정까지 번역이라고 넓게 규정했다. 한국인이 한국어 문장을 읽고도 쉽게 뜻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둘 중 한 군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원문의 언어인 출발어의 맥락이 잘 옮겨지지 않았거나 독자가 이해하는 언어인 도착어의 맥락이 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을 하다 자주 부딪치는 어려움 중 하나가 이름과 단위를 어떻게 전달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름과 단위를 표시하는 일과 이를 전달하는 일은 서로 다른 일이다. 독자들이 궁금한 것은 이름이나 단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낯선 이름이 나올 때 독자에게 친절하게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단위가 얼마만한 크기인지 손에 잡히게 그려내는 것도 모두 번역자의 임무이다. 하지만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하려고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다 보면 독자가 줄거리에 몰입하는 걸 방해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요령을 알려준다.


“‘저명한 경제학자 로이스 새플리’라고 적힌 구절보다는 ‘게인 이론을 분배론에 적용해 2012년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로이드 새플리’라고 적힌 구절이 정보로서 질이 더 높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라고 저자가 단정한 글보다는 ‘늘 변하는 시공간 안에 사는 인간에게 변치 않는 보편 가치를 일깨운 철학자 소크라테스’라고 독자에게 근거를 보이는 글이 질이 더 높다. ... 일반 독자는 원문의 도량형 단위를 읽으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고자 하는 거지 실제 수치 정보를 파악하려는 게 아니다. 원래 단위를 살리는 게 가장 좋지만 억지스럽게 고집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화폐를 일관성 있게 현재의 원화가치로 환산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문맥상 불가능한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원’이라고 번역해 버리면 원 작품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원저의 화폐단위는 그대로 쓰되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살려 그 가치의 크고 작음에 비중을 두는 번역이 바람직하다. 작은 돈이라면 ‘기껏 해야, 고작, 겨우, ~밖에 안 된다’는 표현으로 그런 느낌만 살려주면 된다.”


저자는 번역자의 자세에 대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지적과 조언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의 지적과 조언은 번역 뿐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 적용할 만하다.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먼저 정직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쓰는 저자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정직하게 쓴다. 그래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만 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리라 추측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쓰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1인칭은 힘이 세다. 직접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문장을 온전히 책임지는 일이 독자에 대한 봉사다. 감당할 수 있는 1인칭 관점에서 시작하여 점차 외연을 확대하는 태도가 좋다.”


아울러 인용하기 전에 출처가 정확한지 확인하기를 요구한다. 또한 단지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책 제목과 출판사, 그리고 쪽 번호를 표시해 독자 스스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고 말한다. 나도 글을 쓰다보면 누군가 인용한 내용을 다시 인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인용한 이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꼭 원문을 확인하려고 한다. 원문을 확인하지 못할 때 차라리 인용을 하지 않는다. 보고서나 기술적인 문서라면 원문의 출처에 주석까지 달아놓지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쓸 경우 출처를 어느 정도까지 자세하게 표시해야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아쉽게도 책에서 그런 의문에 답이 될 만한 내용은 찾지 못했다.


그밖에도 일일이 손꼽기 어려울 만큼 명심해야 할 조언을 이어가고 있다.


“훈계하거나 설득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문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기억과 추측에 의존하지 말고 기록에 의지하여 추론하라. 한자어와 고유어를 겹쳐 쓸 때 동어반복이나 논리모순이 발생하므로 각별히 주의하라. 문장의 격을 가지런히 맞추는 건 수사법의 전부이며, 격을 맞춘 문장은 단정하고 자연스러우며 일관성도 높다. 문장을 깔끔하게 다듬는 원칙은 단순하다. 줄이거나 빼서 의미를 뚜렷하게 전달한다면 줄이거나 빼는 게 맞다.”


저자는 번역자이면서도 글쓰기에 관련한 책을 여러 권 발간했을 뿐 아니라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열고 있는 글쓰기 교육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라는 제목에서 말하듯 번역보다는 우리말에 더 무게가 실려 있는데, 그러다 보니 저자가 발간한 글쓰기 책에 관심이 생겼다. 그의 저서 중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는 어떤 내용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저자는 책 말미에 번역이론 연구자인 피터 뉴마크가 <번역 교과서 A Textbook of Translation>에 실은 말은 인용해 좋은 번역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있다. “번역은 사랑과 비슷하다. 무엇이 사랑인지 아는 건 어렵다. 그러나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Translation is like love; I do not know what it is, but I think I know what is not.” 그런데 그것이 어디 번역에만 해당하는 말일까. 모든 글이 그렇지 않을까.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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