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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13. 2021

적과의 대화

베트남 전쟁의 교훈

히가시 다이사쿠

신각수 옮김

원더박스

초판 2000년

한국어판 2018년 11월


미국의 아프간 철수가 소환한 베트남 전쟁


지난 8월 16일 아랍뉴스 1면에 아프간에서 미군 철수병력을 나르는 헬기 사진이 실렸다. ‘제국의 무덤(The Graveyard of Empires)’이라는 큼지막한 제목 아래 197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패해 건물 옥상에서 헬기로 자국민을 탈출시키는 사진도 함께 실렸다.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하는 미국의 우방이자 미국을 물리친 탈레반과 같은 신앙을 가진 무슬림으로서 사우디의 미묘한 입장을 절묘하게 표현한 기사로 읽혔다. 미국과 아프간에 대한 애증을 그만큼 잘 표현하기도 어려웠겠다 싶었다.



나는 미국이 아프간에서 철수한 것이 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지만,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할 일이었다. 미국이 철수하고 탈레반 세상이 된지 한 달이 넘도록 아직도 많은 언론에서 미국이 무엇을 잘못 판단한 것인지에 대한 분석기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의 첫 패배로 기록된 베트남 전쟁이 아울러 소환되고 있다.


내게는 남베트남ㆍ북베트남ㆍ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보다 월남ㆍ월맹ㆍ베트콩으로 더 익숙했던 베트남 전쟁이 소환되면서 예전에 언뜻 보았던 <적과의 대화>라는 책이 떠올랐다. 베트남인 3백만 명 미군 5만8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들이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난 1997년 6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나흘간 마주 앉아 왜 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는 없었는지 격론을 벌인 기록이라고 했다. 전자책을 사서 앉은 자리에서 읽기를 마쳤다.


저자인 NHK 히가시 다이사쿠 기자는 당시 회의록과 사진을 입수하고 참석자들을 인터뷰해 NHK 스페셜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 베트남 전쟁ㆍ적과의 대화>라는 방송을 내보냈으며, 2년 후 방송에 담지 못했던 비화를 담아 이 책을 출간했다. 저자는 이후 어떻게 하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지, 기왕 일어난 전쟁이라면 어떻게 해야 빨리 끝낼 수 있을지 하는 문제에 천착하였다. 그 관심은 캐나다 유학으로 이어졌고, 이 책을 저술하기 1년 전인 2009년 유엔 정무관으로 아프간에 부임하여 카불에서 화해와 재통합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유엔 정무관으로서 아프간의 화해와 재통합의 열쇠를 <적과의 대화>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십 년도 넘은 과거에 쓰인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 언급된 양측 전쟁 당사자들의 회한과 문제의식은 저자가 이 책을 쓴 당시의 아프간 상황뿐 아니라 현재 아프간 상황에 대입해도 전혀 어긋남이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베트남 전쟁이 무지와 오해, 그리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결과였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그 교훈이 어디 아프간 전쟁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하노이의 3박 4일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였던 맥나마라 당시 국방부장관(이후 모든 직함은 당시의 직함을 말함)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회고록을 쓰고 난 후 당시 베트남 지도자와 마주 앉아 베트남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각자가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고 전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는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진심으로 논의해 후세에 남기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그 무렵 베트남 외무부에서는 맥나마라가 회고록에서 적극적으로 반성한 것을 정식 사죄로 이해하고 맥나마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뿐 아니라 현재 베트남의 가장 커다란 정치적 과제는 어떻게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 생활을 향상시킬까 하는 것이며, 그를 위해 미국의 높은 기술력과 자본을 도입하고 미국으로 수출을 늘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뿐 아니라, 맥나마라가 주장했듯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솔직히 돌아보면서 배우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미국과 관계를 심화시키는데 손해가 아니라고 판단해 대화에 응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양측의 최고 책임자는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과 보응우엔잡 베트남 최고사령관이었지만, 보응우엔잡은 연로해 참석하지 않고 베트남 외무차관이었던 응우옌꼬탁이 하노이 대화를 이끈다. 때로는 서로의 견해에 공감하기도 했지만 회의시간 대부분 양측은 격렬하게 충돌한다.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으며, 확인되지도 않은 정보나 일방적인 짐작으로 사태를 오판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제대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전쟁을 좀 더 일찍 끝내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을 확인한다. (그래서 이 책에 <Missed Opportunities?>라는 부제를 붙인다.)


오해의 출발; 도미노 이론


미국은 베트남이 중국과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공산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마치 도미노가 무너지듯 주변 국가가 모두 공산화될 것으로 여겼고, 그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이 베트남과 다른 국가 사이의 전통적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해 빚어진 오해였다. 북베트남은 공산주의 혁명을 목표로 한 것이 분명하지만 주변 국가들까지 공산화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미국은 베트남과 소련ㆍ중국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상호 의존 관계였지 결코 베트남이 중국이나 소련에게 지시나 명령을 받는 관계는 아니었다. 미국 대표단은 베트남이 당시에 이런 상황을 설명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이 오랫동안 중국과 전쟁을 되풀이했고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중국의 간섭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미국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 1945년 호찌민의 편지


호찌민은 1945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는 프랑스에 반대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노이 대화에서 쩐꽝꼬 베트남 외무부 대외정책국장은 미국은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리고 프랑스 식민주의 편을 들어 남베트남 국민을 살육하고 북베트남을 폭격했기 때문에 베트남에게는 전쟁을 하고 말고 선택할 방법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싸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미국이 호찌민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를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대해 체스터 쿠퍼 미 국무부 외교관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가슴이 철렁했던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 정부는 그것 말고도 다른 현안이 무수하게 산적해 있어서 베트남은 안중에도 없었다. 당시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독일과 일본이지 베트남은 아니었다. 1945년 호찌민의 메시지가 미 국무부에 날아들었을 때 국무부에서는 베트남 같은 곳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현실은 호찌민 주석은 물론이거니와 베트남이라는 국가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 메시지는 베트남에게 긴급한 것이었겠지만, 그때 미국이 훗날 닥쳐올 비극을 알았더라면 미국이 틀림없이 달리 대응했겠지만, 그때는 베트남에 대한 확고한 정책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 누구에게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누구에게는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할 수 있다. 강대국이 누군가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단지 강대국에게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이거나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상황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안위가 강대국의 상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상황을 지렛대로 사용해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의 사례처럼 그들이 관심은커녕 그런 사실이 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 쁠래이꾸 공군기지 피격


1965년 초 워싱턴에서는 아직 전쟁을 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의견이 갈려있었다. 존슨 대통령은 번디 보좌관에게 베트남에 가서 상황을 보고 군사 개입 확대ㆍ현상 유지ㆍ단계적 철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번디 보좌관 일행이 사이공에 있을 때 미군 최대 거점 중 하나인 쁠래이꾸 공군기지가 공격을 받아 미군 병사가 사망한다. 그때 소련의 코시긴 수상이 하노이에서 북베트남 정상과 회담을 하고 있었다. 번디 보좌관은 자기가 사이공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북베트남 정부가 코시긴 수상에게 미국에 굴종할 생각 따위는 없다는 자세를 과시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베트남 정부군 제2군단 사령부를 치기 위해 북베트남 제5군 관구사령관이 독단적으로 결정해 30명에 불과한 부대가 공격에 나선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함께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게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번디 보좌관 일행이 사이공에 머물고 있던 것도 코시긴 수상이 하노이에 머물고 있던 것도 몰랐다.


하노이 대화에서 중부사령관 당부히엡 장군은 “쁠래이꾸 전투는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소소한 공격에 지나지 않았으며, 하노이 정부는 그런 작은 공격에 일일이 명령을 내리지 않고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맡기며, 미군 수뇌부에 동태에 주의를 기울였을 뿐 미국 외교관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미군 야전사령관 데일 베사 장군이 “어떻게 일개 관구사령관이 하노이 총사령부의 허가 없이 언제라도 공격 명령을 내릴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대표단을 이끌던 응우옌꼬탁 외교차관은 “지휘명령 계통이라는 것은 공업화 과정에서 성숙되어 가는 것인데, 베트남은 미국과 달리 공업국이 아닌 농업국이기 때문에 지휘명령 계통을 이루는 정보 전달수단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이처럼 미국과 베트남은 서로 다른 가치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이 쁠래이꾸 공격이 하노이의 명령이라고 확신한 것은 그들의 전쟁 상식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베트남 측에서 보자면 게릴라 공격까지 하노이가 일일이 지령하는 것은 상식 밖일 수 있다. 역사적ㆍ문화적ㆍ문명적 배경의 차이가 개별 인간의 판단을 결정짓는다. 전쟁은 지도자의 판단에 의해 실행에 옮겨지고 그것이 국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판단 착오와 오해가 세계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 모르긴 해도 최근 이십여 년 아프간에서도 동일한 판단 착오와 오해가 일어났을 것이다.


번디 보좌관 일행이었던 체스터 쿠퍼는 하노이 대화가 끝나고 몇 년 후 “만약 그 공격이 관구사령관의 독단적인 결정에 의한 남베트남 게릴라의 단동행동이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게릴라 부대에 대한 보복만으로 종결시킬 수도 있었다. 미국인들은 베트남 사람들이 어떻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생각하는지에 대해 전혀 무지했다”고 술회했다.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 통킹만 결의


하노이 대화의 상견례가 끝나갈 무렵 맥나마라는 보응우엔잡 최고사령관에게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1964년 8월 2일 미국 구축함 매독스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에 이어 8월 4일에 행해졌다는 두 번째 공격은 의문스럽다. 과연 그때 베트남은 공격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 묻는다.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1964년 8월 2일 미 구축함 매독스가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틀 후인 8월 4일 매독스는 선체에 직접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레이더와 수중음파탐지기의 움직임으로 봐서 베트남이 재차 공격을 가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에 존슨 대통령은 선전포고 권한을 일임해달라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통킹만 결의’로 불리는 이 결의안은 8월 7일 미 상하원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었다. 놀라운 것은 베트남 전쟁의 중요한 전기가 된 이 매독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에 대해 확정적인 정보가 없었고, 정말 공격이 있었는지 어떤지 논쟁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8월 4일 공격하지 않았지만 ‘통킹만 결의’는 이미 수개월 전에 초고가 완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미국 정부가 전쟁 개시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베트남이 공격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두 번째 공격은 확인된 것이 아니라 짐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국방부장관도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하원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선전포고인 ‘통킹만 결의’가 이루어졌고, 이 결의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8월 4일 구축함 매독스를 공격하지 않은 게 확인되었더라도 다른 이유를 들어 선전포고를 강행했을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무튼 베트남은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공격을 기화로 미국이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베트남으로서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미국이 정보를 조작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전쟁을 멈출 수 있었던 기회; 비밀협상


미국은 1965년 2월 북베트남을 폭격(북폭)하고 3월 남베트남에 지상군을 투입했지만 전쟁에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 시작하자 손해가 적을 때 가능한 빨리 발을 뺄 수 있도록 북베트남과 협상해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맥나마라는 더 많은 군사력을 투입해 북베트남을 궁지에 몰아넣고 나서 협상을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태는 이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베트남은 정면충돌 대신 끈질긴 게릴라전을 통해 미군을 피폐하게 만들고 남베트남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 맥나마라는 같은 해 12월 대통령에게 승리 가능성이 1/2 혹은 1/3에 불과하다고 보고한다. 미국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힘을 얻자 존슨 대통령은 협상을 지시한다.


하노이 대화에서 맥나마라는 “당시 미국은 베트남을 파괴하고 베트남 사람을 살해하며 미국인에게도 커다란 희생을 초래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베트남 지도자들은 국민의 희생과 고통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폭격을 받아도 전쟁을 계속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쩐꽝꼬 외무부 대미정책국장은 “만약 그런 상태에서 미국과 평화를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면 폭탄이 비 오듯 퍼붓는데 왜 협상에 응했는지를 국민에게 설명해야만 했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1965년 당시 미국은 북폭이 베트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뒤에 북폭이 아무 효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대하지만, 비밀협상을 거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북폭 중지에 대한 군부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다. “지금 폭격을 그만두면 미군 병사가 죽는다. 그래도 좋은가?”라는 군부의 물음을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존슨 대통령은 북폭이 베트남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북폭을 중지시키지 않는다.


아무튼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기를 원했고 그래서 여러 나라를 중재자로 내세우며 비밀협상에 박차를 가한다. 베트남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베트남에게 그런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를 중재자로 내세운다. 하지만 베트남은 미국이 여러 나라를 중재자로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북폭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이 북폭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 상황에서 협상이 진행될 리 없었고, 결국 이 비밀협상은 실패로 돌아간다.


회고와 교훈


맥나마라는 하노이 대화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베트남 쌍방의 지도자가 보다 현명하게 행동했더라면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걸 깨달은 일이라고 회고한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적을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최고지도자끼리 대화했어야 했지만 그것을 게을리 했다고 고백한다. 또한 미국은 하노이 정부를 동남아시아 전체에 공산주의를 확대시키려고 하는 중국과 소련의 앞잡이라고 판단했지만 베트남 역사를 볼 때 베트남이 소련이나 중국에 이용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했다고 후회한다. 그것이 당시의 교훈이기만 하겠는가. 난데없이 베트남 전쟁을 소환하게 된 아프간 사태에서도 이 같은 잘못이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이십 여 년 엄청난 인원과 물량을 희생하고도 저렇게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면에는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저자가 만든 NHK 방송 프로그램에 캐스터로 참여했던 야마무라 히데오는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베트남이 협상을 하다가 그것이 결렬되어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도미노 이론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베트남은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통일과 민족자결권을 찾기 위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미국의 행동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전쟁지도자들이 상대방의 의지와 능력에 대해 무지했고 오해를 되풀이한 것이 그런 큰 피해를 일으킨 것이다”는 멘트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한다.


미국이 저지른 오판 중 하나는 군사행동 확대가 협상을 촉진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점이다. 미국은 북폭을 하면서 평화를 제안하면 마지막에는 베트남이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군사행동 확대가 협상 가능성을 오히려 떨어뜨린다는 사실만 확인한 것이다. 확인은 했지만 미국은 그 당시도, 그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 철군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남북문제에 대해 북한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군사력에서 우위를 차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군사력 우위와 군사행동의 확대가 같은 말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두 말이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남북 화해와 공존을 기대하는 내 생각의 전제가 잘못된 것일까?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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