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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Sep 27. 2021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의 근원을 찾아서

최주훈

비아토르

2021년 9월


코로나로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할 상황이 되면서 교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예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이 소환되고 성경 말씀이 필요에 따라 인용되면서 정부의 비대면 원칙을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악의 소행쯤으로 치부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배의 정신이 지켜진다면 그것이 굳이 대면 형식이어야만 할 이유가 없었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는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에 합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묶여있었다. 자라면서 성경은 사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수많은 언어와 수많은 버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말씀이 한 글자 한 글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고, 성경의 글자가 아닌 성경의 정신을 살피게 되었다.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교회 때문에 몹시 안타깝고 때로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글자가 아닌 그 글자에 담긴 뜻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은 것과는 달리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이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만큼 아는 게 없다. 마침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배의 근원을 살핀 책이 출간되었다. 재미없는 글 누가 읽겠냐고 했던 저자의 염려와 달리 책을 펼치니 서문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배란 고정된 형식도 아니고 누군가를 변화시키거나 개조하려는 인위적인 목표를 지닌 무언가도 아니다. 오히려 살아가는 시공간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종교적 감성의 형태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바쁜 일상의 짐을 덜고 쉼을 얻는 시간이다. 이런 안식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가 새롭게 살아가는 데 예배의 목표가 있다.”


예배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을 선명하게 그려낸 것이었다.


저자는 “4세기 이전까지 교회와 예배의 모습은 일관성이 없고 불확실한 것 천지”라며 “1세기 예배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냥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심각하고 진지하게 옛날이야기(말씀과 예수 사건)하고 밥 같이 나누어 먹고(성찬), 서로 다독이며 미래를 도모(기도와 교제)하는 것이 모임의 골자였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꾸 모이다 보니 정기모임이 되고 사람이 많아지다 모임의 순서와 틀인 예배의식도 생겼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되면서 권위체계도 생기고 화려하고 복잡한 예식이 생겨났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순서 하나하나에 멋진 갑옷처럼 신학적 설명이 덧입혀졌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국 순교자들이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예배는, 지금 반정부투쟁까지 불사해가며 지키려 하는 예배는, 예수 사건과 말씀을 기억하고 성찬을 함께 나누며 기도와 교제를 나누는 것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이니, 그 정신만 지켜진다면 그곳이 교회면 어떻고 각자의 처소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훗날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예배의식과 그에 덧입혀진 신학적 의미를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어떻게 비대면 예배를 예배가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이 회당을 세우고 선민의식을 강화해나간 것과는 달리 선하고 모범적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했다. 저자는 당시에 드린 예배가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만한 여지가 있다면 “그건 거룩한 예배 의식 때문이 아니라 교인 개개인의 삶과 의식 수준, 그리고 그들이 이룬 공동체의 특별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저자는 “예배 의식이 생긴 건 의도치 않은 결과일 뿐”이라는 놀라운 견해를 밝힌다. 그렇다면 지금 개신교에서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지키겠다며 벌이고 있는 투쟁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루터는 가정과 국가와 사회에서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처소가 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예배라고 했다. 이번 코로나는 그런 루터의 가르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런 깨달음으로 인해 오히려 예배를 회복하고 교회를 내 삶의 처소까지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고통조차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의 근원을 살피는 데서는 다소 비켜난 것이기는 하지만 저자가 초대교회에는 눈에 띌만한 전도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설명한 구절에 눈길이 멈췄다. 저자는 “교회는 그저 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공동체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고민하고 가르치는 데 집중했을 뿐이며, 오늘날 같은 복음 전도를 시도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교회의 수많은 전도 프로그램에 매우 회의적이다. 요즘같이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각종 사회악에 연루되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차라리 전도하지 않는 것이 교회를 위하는 길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초대교회가 그랬고 루터도 말했듯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도는 예수 공동체 구성원들이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전도 프로그램을 없애는 것이 바른 전도의 출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저자는 영적 예배는 신비한 예배가 아니라 ‘당연한 예배, 마땅한 예배, 합당한 예배’라는 매우 단순한 뜻이라고 말한다.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예배인 일상의 예배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장으로 이루어지는 예배에서는 삶의 자리에 들어와 있는 어느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저자가 시무하는 루터교회의 주일예배의 공식명칭은 공동예배이며, 그래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다. 유아나 어린이라고 해서 격리하지 않는다. 수년 전 우연한 기회에 저자를 알고 나서 루터교회 영상설교를 들어오고 있다. 간혹 설교 중에 아이들 울음소리가 나는데, 나는 그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앞줄에 앉아 딴짓한다는 이유로 엄마 곁에 앉아 있던 아이를 뒤로 보내라던 교회의 결정에 마음이 몹시 아팠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예배가 거룩하다는 것은 설교 시간에 조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나 초대받아 말씀과 성찬으로 쉼을 얻고 누구든 가족으로 보듬어 안는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공동예배에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은 기독교의 제국화가 이루어진 4세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때로부터 “만인사제직 기능이 사라지고 교인들이 서로 평등하게 공존하며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소통하던 교회 일을 제국의 방식에 따라 계급적 직무로 구별하기 시작했으며, 모든 교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예배를 포기하고 사제와 성가대에 예배를 넘겨버렸으며, 교인들은 점차 예배의 구경꾼으로 전락했다”고 개탄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전락한 예배에 매달려 사회의 온갖 비난을 자초하고 있으니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책의 후반에서 저자는 예배의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 먼저 예배에 관한 공부를 해보라고 권하며 구체적으로 예배의 순서 하나하나에 담긴 성경과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예배에 왜 이런 순서가 필요한지, 그 순서를 왜 여기에 배치해야 하는지, 묵상의 시간이 왜 필요한지, 목사는 왜 강단에 올라가야 하고 옷은 또 왜 그렇게 입는지, 대표기도 순서는 왜 있고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 음악은 왜 필요한지, 교회 절기는 왜 필요한지 상세하게 안내한다. 그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교인들이 예배의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고 거기에서 나오는 무한한 감동을 안고 일상을 살아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가 시무하는 루터교회의 예배는 저자가 말한 대로 가톨릭도 같기도 하고 때로 이단이라는 오해도 받는다고 할 만큼 개신교인에게는 생소하다. 나 역시 몇 년 전 루터교회에서 예배 드렸을 때 사전에 예배 동영상을 살펴보고 순서를 익혔음에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예배가 진행되면서 ‘설교를 듣는 예배’가 아닌 예배 순서를 통하여 ‘참여하는 예배’를 경험할 수 있어 인상 깊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설명한 예배 순서에 담긴 의미는 루터교회 예배를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그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모든 것이 생소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몇몇 설명을 통해 그동안 내가 본질은 잊은 채 형식에 치우친 예배를 드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고 또 몇 가지는 당장 우리 교회 예배에 적용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배에서 침묵의 시간은 완벽한 침묵이어야 한다. 우리의 소리와 모든 행위를 멈추고 고요함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바로 침묵의 시간이다.” - 일반적인 개신교회 예배 순서 중에 완벽한 침묵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침묵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뜻으로 잔잔하게 음악을 연주하지만, 침묵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면 소리와 행위를 모두 멈춘 온전한 침묵이 옳겠다.


“히브리인들에게 무릎은 힘을 뜻한다. 따라서 무릎을 굽힌다는 건 하나님 앞에 내 힘을 굽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 자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고 이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이다.” - 가톨릭교회나 유럽 교회는 무릎을 꿇을 수 있도록 되어있다.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때로는 형식이 내용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이 더 짙어진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자인하는 고백의 일부입니다.” - 저자는 성찬을 “개인의 신앙고백인 동시에 사람 속에서 선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성찬을 받는 이가 앞으로 나온다”고 말한다. 아울러 루터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성찬을 베푸는 것은 “성찬을 보이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설교는 ‘1:다수’ 형식이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찬은 ‘1:1’ 형식이어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그동안 성찬의 의미에 소극적이었던 내 자신을 일깨우는 귀한 가르침이었다. 얼마 전 저자가 성찬을 준비해 군부대에 있는 교인을 심방하러 간 사진을 본 일이 있다. 일상적인 심방까지는 어렵겠지만, 몸이 불편하거나 사정이 있어서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하지 못한 교인을 심방할 때는 성찬을 준비해가는 것이 의미도 있고 심방을 받는 교인에게도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침묵기도와 성찬에 대한 내용은 우리 교회에도 건의해볼만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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