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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Oct 02. 2021

[사우디 이야기 71ㆍ完] 관습ㆍ태도

사우디 이야기 (71ㆍ完)

부임하기 전부터 이곳의 시간관념이 우리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서두르지 말고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라는 조언도 적지 않게 들었다. 부임할 때쯤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 있어 동료를 먼저 보냈다. 부임하고 며칠이 지나도록 사우디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며칠이 지난 날 아침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는데 그러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초면에 인사를 나누는 일에 무슨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나 싶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에 손님이 찾아와 면담이 늦어졌고, 면담 도중에 다른 손님이 찾아오는 통에 별로 이야기 나눈 것도 없이 두어 시간 앉아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동료라고 해도 용건이 있으면 찾아가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거나 상황을 알아보는 것을 상식으로 여긴다.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서 예고 없이 찾아갔더라도 상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그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게 최소한의 예의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면담 도중에 손님이 찾아와 대화가 끊어졌다는 동료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화 도중에 끼어들었다는 사람도 그렇고 그걸 제지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 파트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부임하고 나서 보니 동료가 말한 그대로였다. 파트너와 대화하는 도중에 손님이 불쑥 찾아와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떡하니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자기 할 말을 하곤 했다. 손님이 돌아가고 나서 물어보면 급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생각해보니 중요한 일이 있는 손님들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이렇게 무례한 사람들이 있나 싶고 무시를 당한 것 같아서 몹시 언짢았다. 그런 일을 자주 겪으면서 그것이 이곳의 문화인가 생각하게 되었고, 그럴 경우 두말 않고 내가 자리를 비켰다.


시간관념이 우리와 다르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나름 각오도 다지고 왔지만 듣는 것과 겪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의논할 일이 있어 다음날 아침에 회의하기로 해놓고 오전 내내 나타나지 않는 건 예사였고, 아예 나타나지 않는 일도 많았다.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는 만날 시간을 정했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중엔 오전 9시에 회의하기로 하면 오전 중은 고사하고 그날 중에 만날 수만 있어도 다행으로 여길 지경이었다.


약속 시간이 지켜지지 않는 건 어디나 다를 것이 없었다. 관공서나 공기업 사람들과 면담 약속을 해놓고 제 시간에 만난 기억은 십 년 넘도록 손에 꼽을 정도이다. 다른 도시에 있는 사람들과 약속을 잡고 출장 갔다가 일정이 늦어져 그날 돌아올 항공편을 놓치기도 하고,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확인해보면 그제야 다른 곳에 있다며 약속을 취소해 먼 길을 허탕치고 돌아와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채 한국에서 출장 오는 이들은 으레 하루 두세 차례, 때로는 그 이상 면담을 계획한다. 그럴 때마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한 곳 방문해도 성공한 거라고 설명하고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파트너는 가끔 합작사업 추진을 위해 한국 조선회사에 출장 갔던 이야기를 한다. 인상 깊은 일이 여럿 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자기네 일정이 시간 단위가 아니라 15분 단위로 이루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회사 직원들이 사우디에 출장 왔을 때 마치 무슨 작전을 펼치듯 일정을 안내한 일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일상인데 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상대에게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게 언짢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야 피해를 최소화하거나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체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체면이 손상될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꽤 오래 일했지만 이들이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일을 보지 못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은 둘째 치고라도 상황이라도 알려줘야 대책을 세울 텐데, 체면이 깎이는 게 싫어서 상황 자체를 알려주지 않아 낭패를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거절하거나 곤란한 일이 생길 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진행상황이나 결과를 알고 싶어 연락했는데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면 그 일은 틀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단지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닐 수 있지만, 그런 경우에는 상황이 되는 대로 전화하기 때문이다. 뭔가 진전이 있고 일이 성사 되어 생색 낼 상황이라면 묻기도 전에 먼저 전화한다. 물론 나 역시 받고 싶지 않은 전화가 있다. 그렇지만 피해서 될 일도 아니고 피해서 오히려 문제를 키울 수도 있으니 곤란해도 전화를 받고, 어떤 때는 먼저 전화를 해서 일을 매듭짓는다. 그래서 곤란한 상황에도 피하지 않고 전화를 받아주는 이들이 무척 고맙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우디 사람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가 매우 어렵다. 부임한 이후로 수많은 사우디 사람을 만났지만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없으니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럴 때는 사우디 사람끼리 해결하도록 맡겨놓는 게 효과적이다.


사업을 추진하려면 양쪽 모두 속내를 털어놓아야 하는데, 사우디 사람은 좀처럼 외국인에게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혹시 내게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몇 년 전 파트너가 영업을 도와줄만한 사우디 사람 하나를 성과급 조건으로 영입했다. 집안 배경도 좋고 사회적 위치도 있는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발주처 고위 인사들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가 합류한 초기부터 아예 그가 발주처와 나눈 이야기는 내게 말하지 않고 파트너와 의논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때로는 그가 발주처 책임자를 대하는 모습이 매우 무례하게 보여서 오히려 일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사업 몇 건이 성사되어 우리가 좋은 실적을 쌓을 수 있었다. 그 후 파트너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언제부턴가 매우 비협조적이 되었고 그렇게 관계가 정리되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Saudi issue인가 non-Saudi issue인가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Saudi issue는 철저하게 사우디 사람들에게 맡겨 해결하도록 했다. 해결되고 나서도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내게 원하는 역할만 수행할 뿐이었다. 지금도 머리 아픈 문제가 하나 있다. 우리 쪽에 책임이 있는 일이어서 상대의 요구를 일축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문제가 생길 때마다 법인 변호사가 전화하면 한동안 잠잠해진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도 말해주지도 않고 내가 묻지도 않는다.


이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사람을 차별한다 싶을 때가 많다. 인종이나 국적에 따른 차별도 많고 직급이나 외양에 따라 사람을 달리 대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은 자국민 못지않은 대우를 받는다. 미국인 동료와 함께 다니다 보면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친절을 베풀고, 미국을 다녀온 일이 있는 이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서 한 마디라도 더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인도 상당히 대접을 받는 편이다. 그동안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호의는 받아봤어도 그 때문에 차별을 받은 일은 없다. 이곳에 사는 모든 외국인은 거주허가증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기재 내용에 국적과 직종이 표시되어 있어 그 덕을 본 경우도 많다. 그렇기는 해도 미국인만큼은 아니어서 협조를 얻어야 할 일이 생기면 미국인 동료를 앞세우곤 한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시간이나 약속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달라졌다.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시간을 잘 지키고 약속한 일은 성사가 되던 아니던 연락을 주는 이들이 많아졌다. 적어도 연락을 피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졌다. 아직도 일 처리가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언제 어떤 식으로 결정이 뒤집힐 줄 모를 일이 하나둘이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져 가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록 변하는 속도가 성에 차지 않기는 하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나아져 가면 언젠가는 자국민 채용정책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니게 될 것이고, 지치지 않고 그렇게 나아가면 끝내는 자국민 채용정책이 의무가 아니라 혜택으로 여겨질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십 년 넘게 사우디의 선의에 기대에 이곳에서 생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사우디에 신세를 졌고, 그래서 앞으로 사우디의 모든 상황이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자신과 다른 것을 더 많이 포용하는 성숙한 나라가 되기를 축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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