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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Nov 24. 2021

11월 28일, 조력자살

안락사는 사람에게 허용된 권리인가?

미야시타 요이치

박세이 옮김

아토포스

2020년 8월 25일


오랫동안 회복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는 분을 위해 기도해오고 있다. 회복 불가능하다는 말은 신체의 기능이 하나씩 멈춰 죽음에 이른다는 말이며,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막막한 일이다.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니 기적을 구할 수밖에 없지만 기적은 기적일 뿐이니 거기에 기대를 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시기를 구했다. 하지만 고통 가운데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그러니 고통을 덜어주시기를 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하루라도 빨리 생명을 거두어가시기를 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생명을 거두어달라는 기도가 기도로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회의하기도 했다.


나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것이 남의 생명이든 자기 생명이든. 이를테면 사형도 자살도 사람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치료효과 없이 단지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의료의향서’는 아무런 갈등 없이 서명했다. 사람에게 그 정도 권한은 허락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이 고통만 지속되는 상황이라면 어떨 것인가? 신체적인 고통은 완화치료로 없앨 수 있다 치자. 신체 여러 기관들이 하루하루 기능을 잃어간다면, 그래서 꼼짝없이 누워 그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라면,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생명은 내 것이니 네가 함부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실까? 만약 그래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사람을 위한 것인가?


안락사를 취재한 기록인 이 책에서 저자는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것(존엄사)과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자살)의 경계에 여러 선택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통증을 줄이는 완화치료, 임종 과정에서 고통을 없애기 위해 환자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진정제를 최대한 투여하는 세데이션(sedation), 그리고 치사량의 약물을 투여해 환자의 생명을 끊는 안락사가 있다. 또한 안락사는 의료진이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의료진이 약물을 준비해놓고 환자 스스로 약물을 투여하는 조력자살(助力自殺, Assisted Suicide)로 나뉜다.


이 책은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과 유럽에서 성장한 40대 중반의 일본 저널리스트 미야시타 요이치가 안락사에 대해 취재한 기록이다. 이 책의 중심이 되는 고지마 미나의 이야기는 NHK에서 <그녀는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큰 화제가 되었고 이 책 또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소극적 안락사인 조력자살은 스위스ㆍ미국ㆍ호주의 일부 주에서 허용되며 의사가 약물을 투여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허용된다. 스위스에는 안락사를 시행하는 단체가 여럿 있는데 대부분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하며 안락사를 희망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는 라이프서클ㆍ디그니타스 정도이다.


회복 불가능할 뿐 아니라 통증이 극심한 병을 앓고 있다면, 신체 기능이 마비되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처지라면, 누구든 죽음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저자에 따르면 안락사를 생각하게 된 상황은 일본과 서양이 다르지 않은데 안락사를 희망하는 이유는 크게 다르다. 일본인들은 꼼짝도 못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신세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반면에 서양인들은 자기 의사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개인의 권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어느 쪽일까? 폐를 끼치기 싫어서일까, 아니면 자기에게 죽음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내가 그런 상황에서 안락사를 선택한다면 아마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식에게 형제에게 짐이 안 되기를 기도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인터뷰의 중심에 있는 51세 독신여성인 고지마 미나는 말기 암이었다면 아마 안락사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암 환자에게는 있는 기한이 그에게 없다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뜻밖에도 그가 안락사를 선택하는데 경제적인 이유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토로한다.


“저 같은 병에 걸리면 우선 일을 못하게 돼요. 수입이 없어지는 거지요. 그래도 생활은 해야 하잖아요. 쉽게 말해서 제가 가진 돈이 100만 엔이라고 쳐봐요. 만약 남은 시간이 1년이라고 한다면 이 100만 엔을 어떻게 쓸지 계획을 세울 수 있어요. 하지만 제게 남은 시간은 인터넷에서는 9년이나 10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20년을 산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이 100만 엔을 1년 동안 써야 할지 10년 동안 써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거죠.”


고지마는 근육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가는 ‘다계통 위축증’ 환자이다. 기전은 다를지 몰라도 서술된 내용으로는 흔히 루게릭병이라고 불리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환자와 증상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병에 걸렸을 때 그가 말한 대로 경제적인 것도 큰 문제이겠지만 나라면 그보다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그저 병상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일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오랫동안 기도해오고 있는 이웃이 바로 루게릭병을 앓는 분이다. 그분이 신체 기능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이제는 말하고 숨 쉬는 근육마저 마비되어 의사소통도 어렵고 호흡기에 의존해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과연 그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잔인한 말이지만 안락사라는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그분이라면 받아들였을까 궁금했다.


저자는 종말기 의료를 둘러싸고 진작부터 두 가지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하나는 고통을 오래 끄는 것보다 본인이 원한다면 빨리 죽도록 도와주는 게 좋다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죽을 시기는 섭리에 맡기고 고통을 완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의료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무래도 의사가 중심이 되면 수술이나 약을 써서 이 사람의 상태를 좋게 만들어야겠다는 발상에 빠지기 쉽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말기 암 환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암에 걸리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목숨은 대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환자와 가족과 의료진이 생각하는 목적이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환자의 목적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조력자살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고, 회복 가능성이 없으며, 환자가 바라는 치료 수단 또한 없고, 환자가 명확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경우에 한해 매우 한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自殺)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지마도 조력자살은 자살이 아닌 자사(自死)라고 말한다. 말장난으로 여김직 하지만 내게는 두 단어의 함의가 크게 다르게 다가온다. 조력자살을 자살로 구분할 수는 없다는 말이고, 조력자살이 자살이 아니라면 그것을 선택할 권리가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판단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고지마는 11월 28일 조력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팔에 들어가고 있던 수액에 의료진이 연결해놓은 약물 밸브를 연 것이다. 조력자살 과정을 취재하던 저자는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정작 고지마는 정말 잠을 잘 잤고 코도 골았다. 조력자살을 두 시간 앞두고 아침 식사도 했다. 고지마의 두 언니는 처음에는 고지마의 결정을 만류했다가 결국 동의하고 스위스까지 동행했다. 그렇다고 해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던 장면과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 달라 당황할 만한데도 두 언니는 잠시 감정적인 동요는 있었지만 바로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제가 더 혼란스러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고맙다고 하면서 눈을 감는 동생을 보니 오히려 안심이 된다고 할까요. 슬프지만 안도감은 있었어요. 본인이 바란다면 가족을 포함해서 생각했을 때 안락사라는 선택지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지마는 조력자살 전날 밤 남겨질 가족이 겪게 될 슬픔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남겨질 사람이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은 제게도 무척이나 갈등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내 목숨이 남겨질 사람을 위한 것인가요? 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 목숨을 써야 할까요? 너무도 고통스러운 치료를 하고 연명치료를 하고 심장이 멎은 후에도 뼈가 부서지도록 심폐소생술을 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많겠지요. 남겨질 사람은 내 가족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생각보다는 본인이 바라는 바를 해줬다고 생각하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후회의 질에서 보자면 훨씬 편하니까요.”


이 정도라면 조력자살은 자살과 같지 않고 따라서 인간에게 허용된 권한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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