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 Review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식 Dec 12. 2021

구룡채성의 삶과 죽음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상황

곽한영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년 2월 22일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저자의 필력은 온라인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내가 저자의 글을 처음 대한 것은 아마 페더러와 조코비치의 윔블던 결승전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 이후로 음악, 영화, 드라마, 스포츠로 건너와 테니스, 야구, 배구까지 아우르는 저자의 글은 도대체 그의 본업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저자인 부산대학교 곽한영 교수는 놀랍게도 법 교육 전문가로 관련 저서만 해도 열 권을 훌쩍 넘는다. 이런 저자의 본업을 생각한다면 저자의 넓고 깊은 관심사가 놀랍고 때로는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저자가 어느 날 페이스북에 스쳐지나가듯 신간 하나를 올려놓았다. 신간을 내면 한동안 그에 대한 글이 올라오는 게 자연스러운데 어쩐 일인지 한두 번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홍콩의 구룡채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구룡채성인지 구룡성채인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고 그저 홍콩 영화에 나오는 어두컴컴한 동네 정도가 아닌가 생각했다.


아마 올해 초 정도가 이니었을까 싶은데, 저자가 코보컵 여자배구 관전기를 연이어 올린 일이 있었다. 마치 경기를 눈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그려놓아서 페이스북에 들어올 때마다 그 글부터 찾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구가, 특히 여자배구가 그렇게 흥미진진한 경기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저자가 쓴 책이 궁금해졌다. <청소년을 위한 법학 에세이>와 <귀찮아, 법 없이 살면 안 될까>를 읽었다. 두 권 모두 청소년을 위한 것이었는데 법을 논리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내게는 조금 맹숭맹숭한 책이었다. 그러다가 이 책이 떠올랐다.


외국에 살다 보니 종이책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전자책으로 갈증을 달래고 산다. 아쉽게도 이 책은 전자책으로 발간되지 않아 저자에게 언제쯤 전자책으로 출간되는지 물었는데 대답이 석연치 않았다. 전자책 출간 계획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저자 스스로 이 책이 얼른 절판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휴가로 서울에 와서 구매목록에 올려놓은 책 몇 권을 사면서 이 책도 함께 주문했다. 앞부분 몇 쪽을 읽으며 왜 저자가 이 책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는지 쉽게 짐작이 갔다. 사진이 문제였던 것이다. 사진이라면 텍스트를 뒷받침해서 텍스트의 가치를 돋보이게 해줘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사진 때문에 오히려 텍스트의 가치가 가려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섣부른 생각이었다.


법과 규범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인 저자는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이해관계나 권력에 의해 규범이 왜곡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와 같이 새로운 형태의 독립적인 공동체가 과연 존립 가능한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그러던 중 2017년 저자는 구룡채성의 존재를 알고 관심을 갖게 된다. 그 후 2년간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2019년 나흘간 현지를 답사한다. 처음에는 서너 번 더 구룡채성 공원과 홍콩을 방문할 생각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방문이 불가능해져서 그동안 조사하고 준비했던 내용과 나흘간 답사한 결과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몰론 조악하게 인쇄된 사진이 텍스트의 가치를 훼손시킨 것도 몹시 아쉬웠겠지만 그것보다는 당초 계획했던 답사를 마치지 못한 채 미완의 상태로 책을 발간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고, 그래서 홍콩 사태가 진정되는 대로 다시 현지를 방문해 당초 계획한 대로 마무리 짓기를 원한 게 아니었을까 짐작이 갔다.


“청나라 땅인 홍콩은 아편전쟁을 전후로 세 차례에 걸쳐 영국에 할양되거나 조차되었다. 그러던 중에 영국령이 된 홍콩 안의 자그마한 해안 요새였던 구룡채성의 관할권이 청나라에 그대로 남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영국 식민정부의 힘도 중국의 힘도 미치지 않는 공식적인 ‘무정부지대’가 되었다. 1960년대에 여기에 슬금슬금 들어와 사는 빈민들이 생겼고 중국 공산화를 피해 이주한 본토인들이 대거 몰리면서 좁은 요새는 불법 가건물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법건물 위에 레고블록처럼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또 지어 올리는 기괴한 건축이 시작되었다. 자그마치 15층 높이에 달했고, 그나마 인근 카이탁공항(1998년 폐쇄)의 비행기 이착륙을 위해 그 이상의 건축에 대해서는 홍콩 당국도 철거로 맞섰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건물 쌓아올리기는 그치게 되었다. 결국 직사각형 모양의 옛 성터는 그대로 땅위로 솟아오른 15층짜리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되었다.”


“구룡채성은 가로 213미터 세로 126미터의 동서로 길쭉한 26,838제곱미터의 직사각형 공간으로 잠실야구장의 절반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 전성기 때는 그 좁은 곳에 잠실야구장 수용인원의 2배에 달하는 5만 명이 먹고 자고 생업을 이어가며 살았다. 이는 서울 면적의 도시에 11억 명이 모여 사는 것과 같다.”


“무법지대에 매력을 느낀 것은 빈민층만이 아니었다. 중국 본토에서 넘어와 홍콩을 중심으로 확장된 세계적인 범죄조직인 삼합회는 일찍부터 이 지역의 가능성에 주목해 산하의 여러 조직들이 개발 이권에 간여하는 한편 아예 건물 안에 자리 잡고 도박 마약 매춘과 같은 범죄의 온상으로 만들었다. 홍콩 경찰은 이들의 범죄를 지켜보면서도 이 지역이 공식적으로 중국 관할지였고, 경찰조차 꺼릴 만큼 무서운 곳이었으며, 홍콩 경찰이 삼합회로부터 상당 액수의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구룡채성으로 도망가면 체포되지 않는다는 신화, 함부로 들어서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한다는 공포, 홍콩 식민정부의 공식적인 ‘무시’가 결합되자 이 지역은 도시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거대한 범죄 요새가 되었다.”


“느와르(noir)는 프랑스어로 검은 색을 의미하는데 주로 프랑스 범죄영화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따라서 홍콩 느와르는 홍콩에서 만들어진 범죄 영화라는 뜻이다. 홍콩 영화는 전반적으로 파멸을 향해 달리는 뒤틀린 인생들의 폭력적인 삶이 보여주는 비장미를 강조하고 있고, 등장인물 대부분은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는 비극으로 마무리되었다. 영화가 이토록 어두운 것은 홍콩이 처한 암울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를 반영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홍콩 느와르는 당시 홍콩의 시대상을 담은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런 이미지를 한 몸에 담은 장소가 바로 구룡채성이다. 그래서 당시 많은 영화들이 구룡채성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구룡채성 안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삼합회의 지원을 얻어 이를 해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장국영 양가위가 출연한 양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구룡채성이 아직도 존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196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구룡채성은 중국정부와 사이에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홍콩정부가 1987년 전격적으로 철거를 선언하고 1993년 철거를 시작해 1995년 12월에 마무리되어 현재는 구룡채성 공원으로 남았다. 그러니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보며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모습인 줄 알았던 홍콩의 무법지대, 아니 구룡채성이라는 이미지라는 것이 불과 30년 남짓 존재했던 모습이라는 것이다.


당초 저자는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이해관계나 권력에 의해 규범이 왜곡되는 현상을 이해하려고 구룡채성의 존재에 매달렸던 것인데 전대미문의 전염병 때문에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서둘러 봉합하고 만 것이다. 서둘러 봉합했다고는 하지만 한정된 자료로 구룡채성의 소멸 과정을 그려내며 그 과정을 밝히려 애썼고, 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저자의 필력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그 성과가 평면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아마 현지답사를 두어 번 더 다녀온다면, 확보한 자료와 구룡채성의 흔적을 맞춰볼 기회가 한두 번 더 주어진다면, 저자의 분석은 더욱 입체감을 띄게 될 것이다. 하루 속히 코로나가 종식되어 저자가 희망한 대로 깊이와 넓이를 더한 개정판을 만나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누구든지 쉽고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사진도 손을 좀 보고.


홍콩이라는 이름이 처음 문서에 등장하는 것은 명말 청초의 일이다. 광둥성 동관 지역의 특산물인 향나무를 홍콩 섬에서 거래했기 때문에 향나무 항구, 즉 ‘香港’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를 광둥어로 발음한 것이 홍콩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중동 라이벌리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