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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18. 2022

중동은 왜 싸우는가?

중동 근현대사 교과서

박정욱

지식프레임

2018년 11월 16일


사우디에 십 수 년 살았어도 이슬람에 대해서도 역사에 대해서도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그러고서도 십 수 년 이곳의 삶을 경험했으니 사우디에 대해 어지간히 안다고 착각하고 산다. 이제 떠날 날을 앞두고 나서야 비로소 ‘이슬람’과 ‘아랍’과 ‘중동’의 차이를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하게 되었다.


최근에 읽은 동아일보 이세형 기자의 <중동 라이벌리즘>에서는 중동 정세를 다섯 가지 대결구도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사우디와 이란의 대결구도가 아주 흥미로운데, 현 정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니 그것으로 역사적 배경을 포함한 전체 구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사우디와 이란의 관계는 그런대로 자료도 있고 현지 언론에 가끔 역사적 배경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우디와 다른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가 국가마다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배경에 대해서는 확인할 만한 자료를 얻기도 어렵고, 직접 그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도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한 마디로 설명하기엔 배경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듣자하니 이라크와 요르단 왕실이 한 가문이라고도 하고,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는 사우디가 요르단 왕실에는 유달리 깍듯하고, 바레인과 카타르가 아랍에미리트의 일원이 될 뻔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란과 전쟁을 치른 이라크가 이란의 숙적인 사우디와도 전쟁을 치렀고, 아랍국가의 일원인 레바논이 헌법에 따라 기독교도를 대통령으로 뽑는다. 무슬림형제단과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한 뿌리에서 분화된 조직이라는데 같은 나라에서 어떤 때는 환영하고 어떤 때는 추방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하기는 했어도 어디 마땅히 물어볼 곳이 없었다. 물론 그 분야 연구자들이 있을 것이니 찾으면 어딘가 답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절박할 일은 아니어서 그저 궁금함과 아쉬움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떠나기 전에 나름대로 알고 있는 중동에 대한 이해를 정리할 겸해서 집중적으로 중동 관련 책을 읽고 있다. 최근에는 사우디의 헌법인 통치기본법을 읽고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의 헌법과 비교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오늘 문화방송 박정욱 피디의 <중동은 왜 싸우는가>를 읽기에 이르렀다. 이미 방송을 통해 중동에 대한 저자의 전문적인 식견을 접했던 터라서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서관 장서를 빌려보다가 곧 덮고 그 자리에서 책을 주문했다. 읽다 보니 눈으로 읽어서 될 책이 아니었다. 밑줄도 긋고 궁금증이나 생각을 메모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에서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근무하고 있지만 알고 있는 건 업무와 관련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이 책의 가치를 평가하는 건 주제넘은 일일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중동 근현대사에 대한 책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 책을 권할 만하다. 교과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학술서적에 들어갈 내용을 일반교양서의 문장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슬람의 탄생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을 아우르는, 그리고 무슬림형제단으로부터 비롯되고 분화된 테러조직을 포함해 지금 중동이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읽고 이해하는 데도 적지 않은 품이  들었는데 이 책을 쓰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었을까. 뒷장을 들쳐보니 무려 12쇄다. 5백 쪽에 가까운, 딱딱하기 그지없는 주제를 다룬 책으로서는 이례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럴만하다.


이 책은 중동의 현재 상황을 야기한 역사적 배경과 그 진행 과정을 21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그 중 내가 특히 관심을 두고 읽었던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내용을 정리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이슬람주의, 이슬람국가


저자는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와 이슬람주의(Islamism)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국가운영 뿐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과 사고방식까지 꾸란과 하디스를 따라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실정법으로 만들어 국가 통치 원리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이념인데, 그래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세속주의 세력이나 외세에 대한 무력투쟁도 정당하게 여긴다. 이슬람주의는 단순한 종교적 광신이 아니며, 그들에게 이슬람주의는 실패한 근대화 모델을 대신할 대안이다.” 나는 저자의 설명과 반대로 이슬람 근본주의가 이슬람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쯤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단어만으로 보면 그런 느낌이지 않은가. (무지를 변명하기 위한 소심한 반항쯤으로 여기시라.)


저자는 종교 공동체인 움마가 존재했고 이후 종교가 주변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국가가 탄생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채 한 몸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이슬람 국가의 주권은 알라에게 있으며 꾸란으로 국가 운영의 기틀을 삼았기 때문에 이슬람국가에서는 근대유럽에서 등장한 인민 주권 개념이 들어서기 어려웠고, 그래서 20세기에 도입된 민주주의와 공화제가 중동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고 설명을 이어간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최근 비교해가며 읽은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 헌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우디는 통치기본법 전체가 이슬람 수호를 위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슬람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조문이 많다. 아랍에미리트는 이슬람을 ‘연방의 공식종교’이자 이슬람의 가르침을 ‘입법의 주요 원천’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카타르 또한 이슬람이 국교이고 모든 법률은 이슬람의 가르침인 샤리아에서 출발한다고 언급한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정도가 딱 그만큼 차이난다.


종교를 앞세운 정치투쟁


그동안 종교는 정치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해왔다. 정치적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은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을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이해해왔고, 그래서 해결이 요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이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사우디와 이란의 갈등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으로 포장된 것’이라고 말한다. 종파간의 갈등이 종교적인 신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우디-이란 갈등의 명분으로 악용되었다는 것이니, 중동의 갈등은 실질적으로 종교 투쟁이 아닌 정치 투쟁인 셈이다. 비약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합의만 이룬다면 종교는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16세기 일어난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는 주민들을 시아파로 강제 개종시킨다. 당시 페르시아에는 시아파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수니파가 더 많았다. 따라서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사파비 왕조로서는 수니파 주민들이 수니파인 오스만제국의 편에 서지 않도록 내부결속이 필요했다. 게다가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는 당시 이슬람제국의 중심인 오스만제국과 대등한 위치에 서고 싶어 했고, 수니파로 있는 한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스만제국이 수니파의 종주국이라면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의 종주국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후 오스만제국에게 패배한 사파비 왕조는 추락한 권위를 회복하고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수니파를 더욱 탄압한다.”


“사파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아프샤르 왕조는 사파비 왕조에 충성하는 세력을 제거할 뿐 아니라 수니파가 대부분인 이슬람 세계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서도 소수세력인 시아파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수니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폭압정치를 일삼던 아프사르 왕조가 쫓겨나고 다시 시아파로 회귀한다.”


“이와 같이 이란이 시아파로 개종한 것이나 수니파에 우호적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시아파로 회귀한 것 모두 오스만제국과 경쟁이나 이슬람 세계에서 패권을 잡기 위한 정치적 판단이다. 그러니 이란과 사우디의 갈등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이 아니다. 이란과 사우디의 정치적 갈등은 이란으로 대표되는 시아파와 사우디로 대표되는 수니파의 대결, 거슬러 올라가자면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의 정치적인 대결인 셈이다.”


페르시아제국에서 이란으로


사실 사우디에 부임하기 전까지 이란이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국가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지역적으로는 중동이지만 아랍국가와는 언어도 역사도 달랐다. 저자는 아랍과 이란은 무엇보다 정체성이 다르며 오랫동안 서로를 타자로 인식해왔다고 설명한다. 애초부터 서아시아 지역의 최강자는 페르시아였고, 아라비아 반도에 이슬람 세력이 크게 일어선 이후 200년 동안 아랍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페르시아라는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서아시아 전역에서 이렇게 넓은 제국을 다스려본 경험은 페르시아가 유일해서 아랍 우마이야 왕조나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를 지배할 때도 결국 역량 부족을 인정하고 페르시아 출신 관료를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페르시아의 후신인 이란으로서는 그 자리에 들어선 사우드 왕가를 아랍의 맹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페르시아제국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 영국은 현지 사령관 아이언사이드의 부관인 레자 칸을 페르시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철수한다.


“레자 칸은 페르시아의 수도 테헤란에 무혈입성하고 의회의 지지를 얻어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 팔라비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꾼다. 이란 정부가 세속화 정책을 펼치자 시아파는 반정부 운동의 중심세력이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란 정부는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독일과는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에 따라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침공하지만 이란 국민들은 이란 정부에 등을 돌리고, 국왕은 망명하고, 그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팔라비 왕가의 폭정에 시달린 이란 국민들은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반정부 혁명을 일으켜 팔라비 왕가를 축출한다. 그리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이슬람주의 공화정, 이슬람 법학자들이 국가 권력의 최상층에 존재하면서 통치하는 국가가 되었다. 종교가 사실상 국가기관이 된 것이다. 국민들 삶의 전반에도 이슬람 원리가 적용됐다.”


이슬람 종주국으로서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는 이슬람의 종주국답게 모든 체제가 꾸란과 하디스에 의해 운영된다. 그러나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통치 가문인 사우드 왕가에게 이슬람이란 그저 통치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1744년, 꾸란에 근거한 올바른 유일신교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슬람 개혁운동의 지도자 와하브와 디리야를 벗어나 더 넓은 지역의 통치자가 되고 싶은 야심가 사우드가 만난다. 와하브는 사우드가 열정과 사명감이 큰 무리를 모을 수 있도록 종교적 이념과 명분을 제공하고 사우드는 와하브의 개혁운동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다.”


“1902년, 파워게임에 밀려 쿠웨이트로 패퇴했던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리야드를 공격한다. 처음에는 라시드-오스만 연합군이 우세했지만 결국은 궤멸되고 사우드 가문에 계속 주변을 정복해간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이 독일 편에 서자 영국은 사우드 가문과 샤리프 후세인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 오스만을 공격하도록 한다. 이후 사우드 가문은 샤리프 후세인을 물리치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세운다. 아라비아 반도의 지배자가 오스만에서 사우드 왕가로 교체된 것이다. 다른 아랍 국가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경을 나누고 인위적으로 세운 것인데 반해 사우디는 스스로 영토를 정복해 국가를 세운 것이다.”


다른 국가는 타의에 의해 세워졌지만 자기들은 스스로 국가를 세웠다는 것이 사우디의 자부심이요 아랍의 맹주를 자임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사우디는 국가 수립 이후 최근 급격한 개방정책을 펼치기 전까지 일관되게 종교적 보수주의를 고수해 온 것은 아니다. 독립 이후 나름 개방화의 길을 걷다가 1979년 메카 점거사건 이후 급격하게 보수화한 것이다. 그런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메카 점거사건이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라면 왜 개방화를 가속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로 회귀한 것인지 궁금했다. 저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차 세계대전 무렵 사우드 왕가가 라시드-오스만 연합군과 맞섰을 때 와하비즘을 따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이크완의 도움을 받는다. 사우드 왕가는 근본주의자가 아니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신들의 결정에 반발해 이크완이 이라크를 공격하고 메디나의 이슬람 유적을 파괴하자 1929년 사빌라 전투에서 이크완을 궤멸시킨다. 이때 살아남은 이크완의 후예가 1979년 ‘사우드 왕가가 이슬람의 길을 벌이고 타락했다’고 비판하며 메카를 무력 점거하자 사우디 정부는 이를 진압한 후 와하비즘을 따르는 국민들의 비판이 확산될 경우 왕정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종교적 보수주의로 회귀한다.”


이슬람 큰집으로 대우받는 요르단


아라비아반도와 북아프리카 대다수의 국가는 사우디에 기대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우디에 취업한 자국민들의 송금이 국가수입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자국 상품을 사주는 큰손도 사우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 간에도 그렇고 정부 간에도 주종관계로 비칠만한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유독 요르단 왕실에 대해서만큼은 사우디 왕실이 지나치리만치 깍듯한 모습을 보여 의아했다. 왕가의 혈통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요르단 왕실과 사우디 왕실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인 독일과 연합한 오스만제국을 해체하려 들자 오스만제국의 황제는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성전을 벌이자는 메시지를 선포한다. 이에 맞서기 위해 영국은 메카를 다스리고 있던 하심 가문의 샤리프 후세인에게 손을 내민다. (맥마흔-후세인 서한) 하심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와 그 남편 칼리파 알리의 후손, 즉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으로 아랍 사회에서 특별한 존경을 받아왔다. 샤리프 후세인은 영국에게 오스만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대신 아랍독립왕국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영국은 이를 수용했지만 아랍독립왕국의 범위는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분할하는 별도의 비밀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이크스-피코 협약) 그 결과 영국은 이라크를 프랑스는 시리아를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은 국제공동관리구역으로 남겨둔다. 영국은 동시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데 동의한다. (벨푸어 선언) 아랍 전 지역의 통치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샤리프 후세인은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사우드 가문과 충돌하지만 궤멸 수준에 이를 만큼 타격을 입는다. 샤리프 후세인은 아랍독립왕국을 세우는데 동의한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강력하게 항의하는데, 이를 달래기 위해 영국은 샤리프 후세인의 둘째 아들 압둘라 후세인을 요르단 국왕으로 선포한다. 뒤이어 영국은 자기들에게 대항한 시아파 아랍인ㆍ수니파 아랍인ㆍ쿠르드인이 사는 지역을 묶어서 이라크왕국을 세우고 샤리프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잘 후세인을 국왕으로 선포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요르단 왕실은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이라는 말이겠다. 그건 그렇고, 괄호 안에 적어놓은 것은 영국이 주도한 사건인데, 그 결과로 오스만 영토가 시리아ㆍ요르단ㆍ레바논ㆍ이라크로 나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오늘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여러 국가의 이익이 상충되는 세 사건이 영국 입맛에 맞도록 영국에 의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국가는 힘을 가져야 한다.


무슬림형제단에서 출발한 테러집단


미국이 9.11 테러에 대한 기록을 공개한다고 했을 때 사우디 언론 대부분이 지나치리만치 촉각을 세우는 것이 낯설었다. 테러범 대다수가 사우디인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관련 보도에 지나치게 촉각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그것이 일부 국민의 일탈이 아니라 국민 정서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것이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무슬림으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이슬람 가치와 충돌하는 일인 줄 알게 되었다. 9.11로 대표되는 이슬람 테러집단이 만들어진 계기와 역사적 배경, 그리고 분화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난 하산 알 반나는 유럽보다 크게 뒤진 이집트의 현실에 개탄하면서 그 대안을 유럽식 근대화가 아닌 순수한 이슬람에서 찾으려 한다. 이집트가 뒤진 것이 서구 문물과 사상이 이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이슬람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무슬림형제단을 세운다. 무슬림형제단은 온건한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이집트 왕정의 탄압과 대결하면서 점차 급진무장투쟁을 옹호하는 이슬람주의로 변한다. 1967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벌인 6일 전쟁에서 패하자 후임인 사다트 대통령은 무슬림형제단을 회유한다. 무슬림형제단 소속 인물에게 고위 공직을 제안하고 헌법에 ‘샤리아는 입법의 주요한 원천’이라고 명시하기에 이른다. 사다트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큰 피해를 입히고 체면을 회복한 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자 무슬림형제단은 사다트를 강력히 비판하고 급기야는 급진 이슬람주의 단체가 사다트를 암살한다. 후임인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들을 강경하게 탄압한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주의 사상가를 받아들인 사우디는 이들이 제다에 있는 킹압둘아지즈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주선하는데, 이 학생들 중 하나가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지하드(성전)에 참여하기 위해 이슬람주의자들이 아프간으로 몰려든다. 오사마 빈라덴은 이곳에서 전사를 키워내기 위한 훈련캠프를 세운다. 이 훈련캠프는 훗날 알카에다로 발전한다. 오사마 빈라덴은 아프간에서 시작된 지하드를 사우디나 이집트와 같은 주변 아랍국가에 적용하려 한다.”


“1990년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 상황을 만회하고자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사우드 왕가는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을 아랍 공화정이 아랍 왕정을 공격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라크의 다음 목표가 사우디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사우디 정부는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자 이슬람주의 세력이 크게 반발한다. 이때 오사마 빈라덴은 알카에다를 투입해 이라크군을 물리치겠다고 제안하지만 사우디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국에 파병을 요청한다. 전쟁은 미국과 사우디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지만 이슬람주의 세력은 ‘이슬람 성지를 품은 땅에 십자군이 들어오도록 허락했다’며 비판한다. 이슬람 근본주의 관점에서는 같은 무슬림인 사담 후세인이 아니라 미국이 진짜 적이기 때문이다. 알카에다를 양성하고 있던 오사마 빈라덴도 사우디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에 분노해 매섭게 성토하자 사우디 정부는 오사마 빈라덴의 국적을 박탈하고 계좌와 자산을 동결한 후 그를 가문에서 내쫓도록 종용한다.”


“1996년 알카에다는 미국에 대한 지하드를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물러나자 아프간은 내전이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이 탈레반이 급성장한다. 탈레반은 1400년 전 예언자 무함마드가 살던 방식대로 살아감으로써 그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며 아프간에 이슬람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한다. 알카에다는 2001년 9.11 테러를 저질러 3천 명이 죽고 6천 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진부만 폭격 이후 미국이 당한 최악의 공격이었으며 단일 테러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사이다. 비행기를 공중 납치한 19명 가운데 15명이 사우디 출신의 중산층 이상 고학력자였다.”


수니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이유


이슬람 양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누가 이어야 하느냐를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나뉘었다. 혈족이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 시아파의 주장이었고, 신에 대한 경건함을 지니고 무슬림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 수니파의 주장이었다.


저자는 초기 무슬림들이 평등주의를 중시했다는 점으로 볼 때 무슬림 대다수가 혈통에 따른 권력 승계에 거부감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그의 딸 파티마가 무함마드의 소유였던 파타크 오아시스의 소유권이 혈육인 자기에게 있다고 선언했지만 초대 칼리파인 아부바르크가 “알라의 예언자는 사유재산을 지니지 않았다”며 파티마의 주장을 일축하고 오아시스의 소유권을 모든 무슬림에게 돌린 사실을 서술한다.


사우디에서 십 수 년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장례문화였다. 국왕이라도 사망한 다음날 장례를 치르고, 장식은커녕 그저 들것에 올려놓고 옷으로 둘둘 말아 운구하고, 땅에 묻고 난 다음 그저 돌멩이 몇 개로 눌러놓는 것이 전부였다. 상하가 분명하고 심지어 주종관계인데도 때로 엉뚱하다 싶을 만큼 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고, 그래서 난감한 상황을 여러 번 맞기도 했다.


이슬람에 대해 알아갈수록 평등이 이들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 줄 이 책을 읽어가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혈족 승계를 주장하는 시아파보다는 평등한 상태에서 믿음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수니파가 이슬람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수니파가 시아파에 비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는 세계 거의 유일한 실질적인 왕국으로 남아 혈족 승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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