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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an 26. 2022

유일신 야훼

정치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국가문서

김기흥

삼인

2019년 4월 15일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무오류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십자가 구속, 예수의 부활과 재림, 성경에 기록된 기적의 실재, 이 다섯 가지를 진리로 여기는 믿음이 근간을 이룬다. 신앙을 상식으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현대 상식으로는 근본주의 다섯 진리 중 어느 하나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독교인으로서 내 신앙도 대체로 상식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라 “개별적 인간이 신비 체험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각했다”는 전작 <역사적 예수>에서의 저자의 주장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작에서 저자가 주장한 것을 모두 배척하기에는 설득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복음서는 역사서로 편찬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을 북돋기 위해 편찬된 신앙고백서라는 저자의 주장은 그동안 성경에 대해 가져왔던 내 시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만들었다.


평생을 역사학자로 살아온 저자는 한국 고대사와 설화 연구에서 독창적인 성과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 저자가 역사학의 관점에서 성경에 접근한 전작 역시 독창적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후속작인 <유일신 야훼>가 궁금해졌다. 아쉽게도 전자책으로 발간되지 않아 이제야 그의 주장을 접하게 되었다.


전작의 책머리에서 저자는 “인류 문명사의 관점에서 위대한 선각자인 예수의 실체를 탐구하려 했다”고 집필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집필의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성경은 전능한 신인 야훼가 주도적으로 베푼 놀라운 기적과 신비를 기록하고 있지만 야훼는 수많은 인간의 절실한 애원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같은 재앙에 침묵한다. 그렇다면 전능하고 ‘사랑 그 자체’라는 야훼가 고대사회에서만 특별히 인간사에 애정을 갖고 기적을 베풀었다는 말인가? 따라서 성경이 전하는 종교적 신비나 기적은 신의 역사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역사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 야훼의 실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탐구하고자 한다.”


오래 전 요르단 ‘왕의 길’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 출애굽 여정의 일부인 아라바 광야를 바라본 일이 있다. 나 역시 그들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광야 어디쯤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싶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을 고난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어서 무척 감격스러웠다. 그 후로 저자의 전작을 읽으며 성경이 역사서가 아니라 신앙고백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동안 의심조차 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던 성경의 사건 하나하나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조망한 책에 시선이 끌렸고, 급기야는 출애굽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책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출애굽은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출애굽이 부인되면 그 이전 족장의 역사로부터 그 이후 이스라엘의 정통성이 모두 부인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치면서 무엇보다 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궁금했다.


저자는 출애굽 당시 장정 60만 명, 총원 2백만 명이 넘는 인원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다는 고고학적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로부터 수백 년 후 이스라엘 왕국이 건국될 당시 인구가 10만 명이 넘지 않았다고 한다. 요단강을 건넌 후 일어난 아이성 정복, 여리고성 정복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출애굽이 일어난 기원전 15세기에 그런 규모의 이동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역사학자인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는 모세의 무덤이 없는 것이 모세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반증일 수 있다면서, 기독교인인 저자로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가 갈라지는 어마어마한 기적을 경험했다면 어떻게 모세의 명령에 거역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출애굽 서사는 사실이 아니고, 당시 이집트 압제 아래 놓여있던 이스라엘이 중앙고원지대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집트와 투쟁한 역사를 출애굽 서사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사실과 다른 내용을 성경에 남겨놨을까? 저자는 모세오경이 기원전 7세기 요시아 왕 때 신명기가 편찬된 것을 시작으로 기원전 5세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저술되고 편집된 것이며, 신명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세오경은 여호수아ㆍ사사기ㆍ사무엘서ㆍ열왕기서보다 나중에 편찬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은 당시 민족중흥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추진된 신앙운동의 하나로 편찬된 것으로서, 그런 정치 이데올로기를 상고사에 반영해 뼈대를 재구성하고 편집한 신앙고백서라고 설명을 이어간다.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서기관과 같은 상층 엘리트가 편찬하다 보니 자연히 왕권이나 사제권을 옹호하게 되었고, 결국 백성을 지배하기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국가문서가 되었다고 덧붙인다.


* 여호수아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사는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에 의해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사기ㆍ사무엘서ㆍ열왕기서의 기록은 금석문이나 고고학적으로 사실성을 인정받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고고학 조사 결과 다윗과 솔로몬이 건설했다는 궁전이나 성전 뿐 아니라 응당 궁전 주변에 있어야 할 관청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았다.


구약성경은 전능한 신인 야훼,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 인간에게 내려지는 징벌, 징벌을 받고 야훼에게 돌아서는 인간이라는 서사가 수없이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구약성경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국가문서라는 저자의 관점에서 신앙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ㆍ신명기ㆍ여호수아ㆍ사사기에서 인간은 야훼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로 광야를 유랑하고 이민족의 침입에 신음한다. 사무엘서에서는 백성들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주기를 요구하고 사무엘은 그로 인해 훗날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을 경고한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스스로 밝히고 있는 서사이다.


저자는 ‘가나안 하층민이 이집트 지배에 저항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능할 것으로 기대한 야훼를 민족 신으로 받아들인 것’이지 야훼가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수많은 처첩들이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신을 위한 신전을 세우고, 그것에 대해 야훼가 질책했다는 것이 바로 야훼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신이 아니라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또한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와 바알 가운데에서 선택하라고 요구한 것 또한 그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니 인간이 야훼에게 복종하지 않은 불신앙은 자신들이 민족 신으로 받아들인 야훼에게 호응하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고,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제정일치를 마감하고자 하는 강력한 요구이자 사무엘이 백성들로부터 소외되면서 권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며, 왕을 세울 경우 그로 인해 내릴 하나님의 징계를 전한 것은 노회한 종교인 사무엘이 섭섭함을 토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구약성경이 국가체제를 잃어가는 과정에 편찬된 것이다 보니 정치적인 자율성은 없고 종교적인 자율성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치적인 사건을 종교적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편찬 배경을 무시하고 구약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어 모든 역사를 야훼가 주관한다고 무리하게 생각하다 보니 인간들의 총체적인 무능과 부패 또는 무책임에서 오는 비극적 참사에 대해 일반인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해석을 내놓아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것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을 자녀로 여겨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혹은 자녀를 연단시키기 위해 고난을 내리는 것이라면 자녀가 피폐해질 때까지 몰아세워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도 그런 모습이 되풀이 되는 것은 야훼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학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지하고 믿었던 주관적 존재에 지나지 않고, 세월이 흐르면서 부족한 역량이 드러나자 끊임없이 자기변명을 신의 뜻으로 포장한다고 일갈한다.


* 저자는 다윗이 사울왕 주변에서 수금 켜는 소년으로, 아들 요나단의 친구로, 딸 미갈의 남편으로 맴도는데, 구약성경은 그것이 우연한 결과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 다윗은 왕실과 맺을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맺은 것이며, 그래서 다윗을 권력지향적인 인물로 보는 것에 무리가 없다고도 말한다. 신앙을 배제하고 텍스트만 읽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야훼란 역사와 함께 점진적으로 그 개념과 성격이 발견되고 보강 확장된 존재이지만, 이런 허점으로 인해 서구 근대 지성에서 난타 당했지만, 아직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옛 이스라엘이 발견해낸 유일신이라는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전작에서 느꼈던 충격과 깨달음을 기대하며 이 책을 읽었다. 전작을 읽으면서 ‘성경은 역사서가 아닌 신앙고백서’라는 역사학자로서 저자의 주장에 크게 공감했고, 그 주장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내 시각이 크게 바뀐 것도 사실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고학적 금석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출애굽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섭리를 설명하려다 보니 성경이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내게 이런 주장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이미 예상하기도 했다.


또한 저자는 구약성경은 국가체제를 잃어가는 과정에서 민족중흥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편찬된 것이다 보니 정치적인 자율성은 없고 종교적인 자율성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치적인 사건을 종교적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앞의 출애굽에 대한 판단과는 달리 이런 저자의 주장은 선뜻 수긍이 되지 않는다. 구약성경이 정치적 사건을 종교적으로 풀어낸 것이라는 주장과 구약성경이 신앙고백서라는 주장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전작만큼 공감하기 어려웠고, 주장이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몇몇 추론은 지나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저 고고학적 금석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사실을 훗날 필요할 때 판단의 근거로 사용할 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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