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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Mar 05. 2022

건국절 소동

중동 국가의 국민을 지칭할 때 국가 이름에 i라는 접미사를 붙입니다. 아랍에미리트 국민은 에미레티(Emirati), 오만 국민은 오마니(Omani), 이라크 국민은 이라키(Iraqi). 그런데 사우디(Saudi)에는 이미 나라 이름에 i가 붙었습니다. 사우드(Saud) 가문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말하자면 사우디 국민들은 모두 왕실의 종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우드 가문이 나라를 세울 때 이슬람 종교지도자인 와합 가문의 힘을 빌립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뜻하는 와하비즘이 여기서 비롯된 말이지요. 말하자면 이슬람을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우디 국왕에게 ‘이슬람 두 성지 메카 메디나의 수호자(The Custodian of Two Holy Mosque Mecca and Madinah)’라는 칭호가 붙은 것입니다.


지금 사우디는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반도에 세운 세 번째 국가입니다. 제1왕국인 다리아 토후국(1744~1818), 제2왕국인 네즈드 토후국(1824~1891)에 이어 1932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3왕국이 세워진 1932년 9월 23일을 건국절(National Day)로 기념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올해부터 2월 22일을 또 다른 건국절(Founding Day)로 삼고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https://www.arabnews.com/node/2029316/saudi-arabia


그런데 위의 기사에서는 새로운 건국절의 출발이 제1왕국 건립시점인 1744년이 아니라 1727년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우디 가문과 와합 가문이 만나 제1왕국인 다리아 토후국을 세운 건 1744년입니다만, 위의 기사에서는 사우드 가문의 수장인 이맘 무함마드 이븐사우드가 그보다 17년 앞선 1727년에 이미 왕위에 올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744년은 토후국을 세우고 이미 왕위에 오른 이븐사우드가 와합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췄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새로운 건국절이 생기면서 이미 건국절이 있는데 또 다시 건국절을 만드는 것이 와합의 흔적 지우기가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견해를 확인하다 보니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새로운 건국절과 와하비즘의 퇴장(The Saudi Founding Day and the Death of Wahhabism)’이라는 기사가 나오고, 왕세자가 더어틀랜틱과 인터뷰에서 “와합은 선지자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단지 종교학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히고, 더 나아가 이슬람 율법을 해석하는 파트와(Fatwa)는 최종적으로 국왕의 권한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말하자면 와합 가문과 거기서 비롯된 와하비즘이 더 이상 국왕과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 그 휘하에 있다는 것을 명시한 셈이자 동시에 이슬람 또한 마찬가지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https://agsiw.org/the-saudi-founding-day-and-the-death-of-wahhabism/?fbclid=IwAR27l0TQXRL6SL9WvrPNj5Oq6wkfbm66xaplV3YUwV04hDGhcZFArrt7x0A


https://saudigazette.com.sa/article/617728?fbclid=IwAR1MucvdppjxAa3rlYusqWZN1uVtiODQqrJAqIVHPFgoJIiESd9yvc1EVCU


https://saudigazette.com.sa/article/617729?fbclid=IwAR09Dm4KX5cDrHmtiRQJX6BV42vD6wj6yz4hQrA22vOD2h4v68eGQ1drpeE


사실 살만 국왕이 즉위하고 그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게 되면서 종교적인 색채를 배제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습니다. 왕세자가 추진하는 사업이 거의 모두 개방을 전제로 하다 보니 사사건건 이슬람의 가치와 충돌하기 때문이지요. 사우디에서 최근 수 년 사이에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는 일 대부분이 관광산업입니다. 만약 이슬람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이슬람의 금기인 술은 물론이고 도박도 금하고 하다못해 관광객의 복장까지 제한해야 하는데, 누가 그런 곳에서 관광을 하겠다고 찾아오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여성 취업이 필수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왕세자가 실질적으로 집권한 이후 지금까지 이슬람의 색채를 지우는 일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악명 높은 종교경찰을 없애고, 여성 운전을 허용하고, 이어서 관광비자를 발급하면서 여성 관광객 복장 규제를 풀었습니다. 여성 인권이 다소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상당 부분 후견인의 동의가 필요한 상태이기는 합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그것도 곧 개선되리라 기대합니다.


새로운 건국절을 공포하면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국가패션위원회에서 건국절에 적용될 드레스코드를 발표한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같은 드레스코드를 적용하겠다는 말은 아니고 전국을 5개 권역으로 나누고 각 권역의 지리적ㆍ기후환경적 특성을 고려해 모두 22종을 권고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전에 비해 여성의 노출 정도가 많이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얼굴을 다 내놓고 팔도 마구 내놓습니다. 왕세자가 세상을 바꾸려고 작정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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