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2.04.17 (일)

by 박인식

젊었을 때는 태반을 길 위에서 보냈다. 우리 현장은 일반 현장과는 달리 작업 기간이 길어야 몇 달이었고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늘 떠돌이로 살았다. 현장 일에서 손 떼고 난 후에는 오히려 모든 현장을 돌아봐야 해서 더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길은 모두 다녀온 듯싶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었던 당시에는 길을 잘 아는 건 상당한 능력이었다.


어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조카가 용인 어딘가 맛집에 예약을 해놨다고 해서 굳이 먼 길을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음식점을 나섰을 때는 이미 어두워진데다가 한국을 떠나 있던 십 수 년 사이에 서울 근교는 상전벽해가 되고 없던 길이 사방에 생겨서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아예 운전을 접을 생각으로 지내다가 다시 며칠 운전을 한 것도 그렇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그것도 밤 시간에 운전한 것이 상당히 고단했던 모양이다. 오늘까지 피곤이 풀리지 않아 교회 다녀와서 낮잠을 몇 시간이나 잤다.


몇 년 전 사우디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운전하는 게 두려워졌다. 사고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상대방 차가 내가 앉은 쪽으로 달려드는 것을 꼼짝 없이 지켜봐야 했던 것이 큰 충격이 되었던 모양이다.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니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 했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예전에는 길눈 밝은 게 대단한 능력이었던 것이 내비게이션 생긴 이후로는 하루아침에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나이 하나 때문에 모든 능력을 부정당한 나와 다를 바 없어서 입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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