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살펴보기 (2)
<차별금지법>은 2007년 법무부에서 제안한 이래 13년이 지난 오늘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발의와 제안이 이루어졌다. 이 중 이전에 발의된 7건은 보수 기독교계의 완강한 반대로 심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국회회기만료로 폐기되거나 발의자가 스스로 철회했다. 이러한 반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강화되고 있어 이번에 발의된 법안이 과연 제정에까지 이르게 될 것인지 염려스럽다.
이 법안에서는 최대 25가지 차별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보수 기독교계에서는 오로지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만을 문제 삼고 있다. 물론 다른 이유로 반대한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다. 최초 법무부 법안에 대해 기업에서 반발했다는 기사가 한두 개 확인되는데, 아마 채용과 관련해 양성평등과 학력차별금지를 불편해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기사 말고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이외의 항목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일반인들에게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라는 용어는 매우 낯설다. 이에 대해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와 같이 성적으로 끌리는 대상에 따라 구분한 것을 ‘성적지향 sexual orientation’으로[1], 생물학적 성과 자신이 인지하는 성이 같은지 여부에 따라 구분한 것을 ‘성별정체성 gender identity’로[2] 정의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역사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의 역사이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두 항목을 빼고, 넣고, 다시 빼고,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한채 국회 회기만료로 폐기되거나 완강한 반대에 밀려 스스로 법안을 철회하기에까지 이르렀다.
○ 2007년 10월 법무부 <차별금지법안> 입법예고. 보수 기독교계와 기업들의 반발로 차별금지 사유 중 ‘병력, 출신국가, 언어, 가족형태, 범죄 및 보호처분 전력, 성적지향, 학력’ 등 7개 항목을 삭제한 후 동년 12월 발의. 2008년 2월 상정. 제17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
○ 2007년 입법예고한 법무부 <차별금지법안>이 동성애 반대운동진영의 반발로 일부 차별금지사유가 빠지자 이에 대응하여 ‘반차별 공동행동’ 출범. 여기서 논의된 (차별금지사유를 모두 포함한) 안을 2008년 1월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등 10인이 발의. 제17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
○ 2011년 9월 민주당 박은수 의원 등 11인이 차별금지사유 중 ‘성적지향’ 등을 삭제하고 차별진정대상을 법무부로 지정한 <차별금지기본법안> 발의. 제18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
○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등 10인이 법무부 차별금지법에 대응하기 위해 출범한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서 논의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안> 발의. 법제사법위원회, 운영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에 회부. 제18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
○ 2012년 11월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인이 <차별금지법안> 발의. 권영길 법안과 동일. 법제사법위원회, 운영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교육문화관광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 회부. 제18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
○ 민주통합당의 김한길 의원 등 51인이 2013년 2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안> 발의. 동년 4월 보수 기독교계의 집단 협박 및 항의 전화로 본회의에서 철회.
○ 민주통합당의 최원식 의원 등 12인이 2013년 2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안> 발의. 동년 4월 보수 기독교계의 집단 협박 및 항의 전화로 본회의에서 철회.
○ 정의당 장혜영 의원 등 10인이 2020년 6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차별금지법안> 발의.
○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20년 6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포함한 <평등법안> 제시. 이 시안을 참조하여 조속히 입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 표명.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논리 중 하나가 이미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여러 종류 있는데 굳이 포괄적 법안을 제정하려는 것은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지적한대로 개별적 차별금지법이 몇 종류 있기는 하다. 이에는 장애인에게 편의제공을 거부하거나 장애인 관련자ㆍ보조견ㆍ보조기구 차별을 금지한 <장애인 차별금지법>, 고령자 고용 촉진을 위한 <연령차별금지법>,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고용상의 차별을 금지한 <비정규직 차별금지법>,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출발한 여성 고용 촉진을 위한 <성차별금지법> 등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는 바와 같이 차별항목이나 차별영역이 일부 분야에 한정되어 있어 전체 차별 요소를 다루고 있지 못하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도 차별 금지조항이 들어있다. 그러나 차별 항목도 빠져있는 것이 많고 실체적인 절차도 들어있지 않아 차별금지에 관한한 선언적 법률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하나만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예; 고령 여성 장애인), 차별 역시 복합적으로 일어난다. 이를 개별적인 차별금지법만으로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처분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따라서 모든 차별요소를 빠뜨리지 않고 이를 유기적으로 제어하자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불가피하다.
십 년이 넘도록 수차에 걸쳐 법안이 발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항목 때문이다. 보수 기독교계에서 앞장서 이 법안을 반대하고 있지만, 스스로 사랑의 종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로서 결과적으로 다른 차별 항목까지 반대하는 처지가 된 것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항목을 제외하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교계 지도자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제외하자는 주장은 차별항목 중에서 더욱 차별받는 항목이 있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차별금지법>으로 ‘차별을 조장’하는 셈이 된다. 이는 <차별금지법>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일 뿐 아니라 오히려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니 재고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얼마 전, 극우적인 성격의 기독교 분파에서는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으로 대표되는 젠더이데올로기를 주체사상을 따르는 좌익-종북의 투쟁도구로 인식한다는 논문을 읽은 일이 있다. 결국 젠더이데올로기 자체가 아니라 좌익을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분파에서는 국가주의를 추종하고 있다는데, 국가주의가 혐오와 배제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은 젠더이데올로기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법안에 포함된 출신국가, 인종, 종교와 같은 다른 차별요소 역시 반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들이 이슬람과 중동난민에 대해 극도의 혐오를 표출해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권고하는 바와 같이) 젠더이데올로기를 제외한다고 해서 그들이 이 법안을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천진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최근 발의된 정의당의 <차별금지법안>은 차별항목 23가지로, 국가인권위원회의 <평등법안>은 21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차별항목이 많은 법안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그것을 모두 배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차별항목으로 규정한 행위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배제된다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은 더 이상 <차별금지법>일 수 없고 <차별조장법>일 수밖에 없겠다.
지금까지 발의된 아홉 개 법안의 내용과 처리 결과는 <비교표>로 첨부하였다.
[1] 2020.06.29 장혜영 대표 발의 <차별금지법안> 제2조 제4항; 이성애(異性愛, heterosexuality), 동성애(同性愛, homosexuality), 양성애(兩性愛, bisexuality), 무성애(無性愛, asexuality)로 구분
[2] 2020.06.29 장혜영 대표 발의 <차별금지법안> 제2조 제5항; 생물학적 성과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cis-gender),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성(gender-queer)으로 구분
[표 1] <차별금지법> 내용 및 처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