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예배 때 간혹 두세 곡 찬양을 드린 일은 있어도 주일예배에 두 곡 이상 찬양을 드린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연습시간은 예배 전 한 시간 예배 마치고 한 시간은 기본이었고, 유난한 지휘자를 만나면 그보다 훨씬 오래 연습을 해야 했다. 루터교회로 옮기고 입교도 하기 전에 얼떨결에 성가대원이 되었다. 루터교회는 예전의 비중이 높다 보니 예배 찬양에 성찬 찬양, 그리고 퇴장 찬양까지 드린다. 한 주일에 무려 세 곡이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습 시간은 삼사십 분을 넘지 않는다. 매주일 여간 조마조마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되면 다들 훌훌 털고 편안한 마음으로 본당으로 올라간다. 연습이 충분하지 않으니 찬양이 흡족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민망해하거나 연습 때 문제를 삼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찬양 드리는 도중에 어물어물대고 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지만, 보아하니 나 혼자 유난을 떠는 모양이더라.
지금까지 만난 지휘자들은 하나 같이 음악적 완성도를 요구했다. 때로 찬양 가사를 음미하며 먼저 은혜를 누리도록 이끌어가는 이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조차도 가사의 의미를 교우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니 평생 드려왔던 찬양은 찬양 이전에 음악이었고, 그래서 음악을 완성도 높게 잘 연주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며칠 전 예배 회중 찬양을 인도하는 밴드의 리더가 화려하게 연주하지 말 것을 권하는 동영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연주가 화려하면 회중의 시선을 모을 수는 있겠지만 그럴수록 예배의 본질에서는 멀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연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찬양은 예배의 일부이고 모든 예배 순서가 그러하듯 기쁜 마음으로 드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터교회에서는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입장할 때부터 퇴장할 때까지 모든 순서가 빈틈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고, 예배 중에 본당 안을 종횡으로 누비는 꼬마아가씨에게 향하는 시선은 따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게 예배드릴 수 있어 기뻤고, 그래서 행복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양주동 선생이 영어의 인칭을 ‘나와 너를 제외한 우수마발이 모두 3인칭’이라고 배웠다던데, 이 말은 “기쁨과 행복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제외한 우수마발이 모두 예배와 무관하다”는 말로 대체해도 어색하지 않겠다. 오늘 비로소 루터교회의 진면목을 발견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