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페친이신 정재욱 선생이 ‘죽기 전에’가 아니라 ‘죽더라도’ 꼭 읽어보라며 고영범 선생의 <서교동에서 죽다>를 추천했다. 책을 주문하려다가 도서관에 신간을 신청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하고 처음으로 정독도서관에 신간 구매를 신청했다. 보름 뒤에 신간이 입고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막상 서가에서는 찾을 수가 없어 사서에게 물어보니 구매 요청한 신간은 신청자가 읽고 나야 등록이 된다면서 별도 서가에서 꺼내주었다.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로 보이는 <서교동에서 죽다>는 내 기억 속에 있는 시절이요 동네였다. 그때와 그곳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리고 있어서 곧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서교동에서 상수동을 거쳐 여의도로, 그리고 제2한강교로 불리던 양화대교를 지나오는 그의 자전거를 따라 오십 년쯤 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어지는 몰락으로부터 “가난이란 서로가 서로로부터, 그리고 사물의 적절한 상태로부터 버려지는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징그러웠던 가난을 떠올렸고, 그것이 옛이야기로 돌릴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며칠 전 회사 홈페이지에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 공연 티켓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다행히 내게까지 차례가 왔다. 알고 보니 고영범 작가가 회사에서 주관하는 벽산희곡상 수상자라고 했다. 현지법인으로 자리를 옮긴 후 시작된 일이어서 벽산희곡상을 제정했다는 소식은 들었어도 수상자까지 알지는 못했다.
소극장치고는 생각보다 무대가 깊었다. 무대장치를 극단적으로 줄이고 오로지 대사와 동작만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연극배우들의 대사 전달력이야 워낙 정평이 나있지만 귀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내가 속삭이듯 말하는 대사까지 불편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주인공 ‘진영’을 연기한 박완규는 100분 내내 긴장을 잃지 않은 채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쏟아내면서 극을 이끌어갔다. 연극 대사라는 것이 대체로 빠르고 일상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것이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킨 무대와 대사가 잘 어우러졌다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나이가 들면서 가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됐고 한 번 들여다보자 싶었다”고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밝힌다. 그래서 몇몇 에피소드를 시나리오로, 에세이로, 때로는 시와 희곡으로, 심지어 기사로 썼다고 했다. 그 중 희곡 형태로 쓴 글은 공연이 가능한 길이로 키워서 2021년 6월에 이성열 연출이 동명의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올렸고,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해체-재구성해서 장편소설의 형태로 다시 썼다고 한다. 순서로는 연극이 먼저였고 소설이 확장판인 셈이다.
소설을 읽은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았는데 진수의 죽음은 기억에 없다. 소설에 없는 내용이었는지, 내가 놓쳤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놓친 것이라면, 그 중요한 서사를 왜 놓쳤을까? 우리가 더 가난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을 때 어머니는 가끔 “이런 가난을 옛이야기로 돌릴 날이 오기는 할까” 혼잣말을 하시곤 했다. 다행히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었는데 그 기억을 불러내는 건 아직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혹시 그 까닭에 진수의 죽음이 상징하는 가난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