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리아산으로 떠난다. 이 사건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관계의 절정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시는데도 많은 이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망설임 없이 그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여긴다.
성경에는 많은 위인이 나온다. 하지만 어느 위인을 막론하고 허물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이 성경이 가진 특징일 뿐 아니라 늘 유혹에 넘어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아마 성경 인물이 모두 완벽했다면 존경의 대상이 되지 사랑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건을 대하더라도 같은 시선으로 봐야할 텐데, 성경의 위인에 대해서는 꼼짝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잘못을 제외하고는 모든 행동에 심오한 계획과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는 다음날 일찍 길을 떠나고, 자식을 제물로 드리러 산을 오르면서 남겨진 종에게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말하고, 제물이 어디 있냐는 자식의 물음에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하는 모든 행동이 자식이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살아보니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어놓을 수도 있겠더라. 아브라함이라고 달랐을까?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받고 밤새 얼마나 뒤척였을 것이며, 명령을 따르지 않을 생각인들 왜 안 해 봤을까. ‘우리’가 돌아올 것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은 확신에 찬 고백이 아니라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한 것, 어쩌면 정신이 반쯤 나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뱉어낸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이가 먹으니 성경이 달리 읽힌다. 믿음의 눈이 의심의 눈으로 바뀌었다. 망하는 길로 접어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