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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우리 시대의 문장가 김인선

by 박인식

김인선

메디치미디어

2019년 7월 5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한 직장에 사십 년을 몸담을 수 있다는 건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그 정도면 평생 양지 바른 곳에서 산 축에 들지 않겠나. 그러니 그렇지 않은 삶을 산 사람들을 이해하는 건 피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나와 다른 상황에 놓인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좋은 교육을 받고 수준 높은 잡지를 만들었지만,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할 뿐 아니라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으며, 영감(inspiration)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 회사를 금세 그만둔 사람이 있다. 마흔이 넘어 그 좋던 집안이 쫄딱 망해 경기도 산자락으로 옮겼지만 타고난 낙천가인지라 괴로운 생활에서도 나름 즐거움을 찾았다. 오페라 해설지 번역으로 푼돈을 벌고 온라인에서 필명으로 글을 썼다. 그러니 곤궁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름을 얻지 못했고, 그렇게 무명인 채로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해서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의 글이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졌지만, 그의 글을 알고 있는 모두가 그를 뛰어난 문장가로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어가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그의 글은 일상을 담은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줄거리가 없으니 반전을 찾아볼 수도 없고, 문장이 특별히 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신산고초를 겪은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재능 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펼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 벗들이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의 유고집을 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글 말미에 중학교 때 그를 만난 이후 곁에서 때로는 떨어져서 그를 지켜본 친구의 회고가 실렸다. 아마 유고집 출간을 주선한 이가 아닌가 싶다. 자기가 김인선을 기억할, 김인선에 대해 글을 쓸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글을 쓰노라고 했다.


영화평론가 김대현이 쓴 회고의 일부이다.


♣♣♣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이 한창기라는 인물이었고 우리 전통문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를 만나면서 그는 모든 면에서 크게 성장했다. 이 잡지사를 삼 년 정도 다녔는데 이 기간 동안 자신의 글을 완성하고 문체를 확립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난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의 대화의 절반은 여자였고 그의 머릿속 암흑물질의 절반도 여자였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그의 평생 주제였다. 그러나 탐구의 대상일 뿐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가 여신으로 떠받들던 여자의 시작은 이탈리아 가수 마리사 산니아였고, 그가 중국어를 공부한 것은 장만옥을 짝사랑해서였다. 그는 사랑 없이, 사랑을 느껴도 부정해버리고 섹스에만 몰두하는 극단적인 탐욕주의자였다. 그는 세속적인 모든 것을 경멸하면서도 섹스는 좋아했다. 섹스홀릭에 가까웠고 그는 그런 자신을 곤혹스러워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섹스를 관장하는 호르몬의 과다분비가 원인이었으리라고 잠정적으로 결론 내렸고 그에게 호르몬을 의심해보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과학으로는 입증하지 못하고 가설로만 남았다.


그는 자신이 계몽주의자라고 자주 말했다. 대화 도중 지적 우월감에 교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야기가 재미있어 늘 들어줄만 했다. 화제는 어느 정도 시차를 두고 주기적으로 변했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집요해서 한 번 관심을 가지거나 의문을 품으면 끝을 보아야 했다. 이제는 백과사전식 지식이 필요 없는 세상이라도 핀잔을 주곤 했는데도 그는 지식 자체보다도 그것을 깨우치면서 느끼는 기쁨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해 그 ‘깨우침의 기쁨’을 포기하지 못하고 평생 공부만 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가 평생 가난을 택한 중요한 계기였으며 영감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그는 늘 후회하면서도 평생 가난한 쪽을 택했지만, 구도자와 같은 삶을 21세기 현대 한국에서 구현하는 일로 그가 얼마나 불화를 겪었을지 상상하기 싫다.


그는 인터넷사이트에 글을 올리면서 그곳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의 글 대부분은 이 시기 사오 년에 걸쳐 쓴 것이며, 이때 가장 왕성하게 글을 썼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은 글쓰기가 최종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거나 유명해지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사라져가는 것을 사랑했다. 활짝 핀 꽃보다 시들어 말라가는 꽃과 풀을 더 좋아했다.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 생명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그의 글은 깊이가 무궁하고 아름답다. 문체의 독창성은 글에 담긴 생각과 잘 반죽되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어 버릴 것이 하나 없다. 표현은 정확하고 기발하며 활기가 있다.


이제 나는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로 김인선을 꼽는다.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글쓴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솔직한 글. 나는 이제야 김인선에 이르러 우리 시대의 문장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


김대현의 아주 절제된, 그러면서 행간마다 김인선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회고를 기억하며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김인선의 삶과 문장과 해학으로 풀어낸 그의 신산한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글을 쓰는 시간보다는 써놓고 다듬고 덜어내는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 없어도 뜻이 통하고 의도를 전달하는데 문제가 없는 부분은 망설이지 않고 들어낸다. 그렇게 들어낼 것을 다 들어내 글은 무엇보다 읽기가 편하다.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는 소리 내어 읽어보면 안다. 군더더기가 많은 글은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내 글 뿐 아니라 남의 글도 그런 기준으로 읽는다. 그렇게 다시 읽은 김인선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문득 김훈이 <칼의 노래> 첫 문장을 쓸 때 고민했다던 지점이 떠올랐다. <칼의 노래>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김훈은 처음에 “꽃이 피었다”가 아니라 “꽃은 피었다”로 적었고, ‘은’이 ‘이’가 될 때까지 담배 한 갑을 태웠다고 했다.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시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시계를 진술한 세계인데, 자신은 사실만 가지런히 챙기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인선 역시 조사(助辭) 하나도 고민하고 골랐겠구나 싶었다.


그는 글 곳곳을 따뜻하고 아름다운, 그러나 이제는 잊힌 우리말로 채운다. 선뜻 쓰기 어려운 ‘놈’이나 ‘년’을 수시로 구사하는데도 글이 흉해지지도 않고 망가지지도 않는다. 신산한 삶으로 인한 고통과 횡포를 부리는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해학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독자가 거부감 없이 그의 적개심에 동조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을 추어주는 김인선 모친의 한 마디에 으쓱해 선심 쓰듯 빈 땅을 빌려주는 ‘어깨 위에 돼지대가리를 얹은 놈’이나, 모친이 그 땅에 애써 가꾼 텃밭을 빼앗아 자기 식당 손님들이 쓸 족구장으로 만들어버린 ‘북어대가리’가 혹시 내 자신이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다.


부족함 없이 자랐고 고급문화에 익숙했던 그는 버스에서 내려 일곱 시 넘으면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는 길을 삼십 여분이나 걸어야 하는 곳에 살았다. 그래서 그의 글이 사람 사는 이야기보다는 풀이며 꽃이며 나무 이야기, 벌레와 산새와 산짐승 이야기로 가득 찬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김대현이 말한 대로 그의 글은 기발하고 활기가 있다. 그는 그가 겪는 우울증을 ‘아무래도 세상에 괜히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이 고름이 되어 해골 속에 가득 고이는 증상’으로 정의하고, 발병 원인도 밝혀지지 않고 쓸 만한 치료제도 개발되지 않은 이 병을 “산기슭에 문득 피어난 꽃, 어린 참새들이 지절대는 소리, 적막한 숲으로 비끼는 낙조, 저녁 빈산의 까마귀 소리, 비 오는 날 아침 오리 우짖는 소리, 달밤에 말랑말랑한 처자의 가슴, 공으로 생긴 현금 다발”로 치료한다. 그러면서 맨 뒤의 두 가지 처방이 단기처방으로는 최고이며, 싸구려 소주도 약간의 도움이 된다고 덧붙인다. 이렇게 자신을 주당으로 여기게 만들어놓은 그는 “지난밤에 소주를 무려 세 잔이나 마시는 만행을 저질렀다”며 이를 ‘기발하고 활기 있게’ 뒤집어버린다.


그렇기는 해도 자기 연민과 회한을 아주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나는 사람이 많은 곳과 시끄러운 곳이 싫다. 서울에서 나올 때마다 감옥에서 탈출하는 기분이다. 저런 지랄 맞은 곳에서 태어나 사십 년을 산 나 자신이 신기하기만 하다.”며 자신이 겪은 신산한 삶을 에둘러 표현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벅찬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한편으로는 아아 가엾은 우리 어머니! 이런 세상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골몰하는 또라이를 사람 만드시느라 그 애를 쓰다가 아무 보람 없이 돌아가셨구나” 하며 국외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돌아보고 울적해 한다.


그는 ‘오페라 해설지 번역’으로 푼돈을 벌었다. 그가 글에서 인용한 “음악에 대한 기호만큼 그 사람의 계급을 확인시켜주는 것도 없으며 자신의 교양과 지적 과시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도 없다.”는 부르디의 말처럼 푼돈을 벌게 만든 ‘오페라 해설지 번역’이 그의 출신 성분과 누렸던 사회적 계급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런 문화적 배경이 있었으니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고집했을 것이다. (우리 때는 ‘서강대학교’라는 이름과 ‘철학과’라는 이름이 막연하지만 앞선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뿌리 깊은 나무>에서 그의 인생으로서는 상당한 기간을 보낸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김대현이 회고한 것처럼 김인선도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스물 몇 해 전에 이 양반 아래서 세 해쯤 월급을 탄 적이 있다. 사회란 곳이 내게는 예나 지금이나 지겹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래도 그때가 가장 당도가 높은 시절이었다.”


아, 내가 김인선을 알게 된 것은 동년배로 그와 함께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일한 어느 벗 때문이었구나.


김인선은 어느 시인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서점에 그의 유일한 시집이 나와 있다. 책값이 삼천 원이다. 삼천 원어치 시를 쓰고 갔구나.” 그의 유고를 모아 펴낸 이 책의 값은 일만 육천 원이다. 그렇다고 그가 일만 육천 원어치 글을 쓰고 갔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일만 육천 원어치의 글이 보여준 그의 흔적은 ‘김인선의 삶’ 편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을 읽었다고 김인선을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아 있을 글 탈탈 털어 이 유고집을 마련했을 것이니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근거를 찾을 수도 없을 것이고, 이름이 나지 않았으니 나중에라도 ‘김인선 연구’ 같은 성과로 그가 재발견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막연하게나마 그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두 번 읽어서 깨달은 그의 진가가 세 번 읽으면 더욱 빛을 발할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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