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살펴보기 (9)
디모데후서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고 있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에 지나지 않는 성경 기자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설령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전히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라면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을까.)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성경 기자가 이해한 것은 당시의 지식과 사고방식의 범위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반동성애 측의 주장을 대하다 보면 수 천 년 전 당시 상황을 바탕으로 기록한 성경을 맥락을 무시한 채 드러난 문자만 읽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조선시대 예송논쟁을 이해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드러났지만, 실제로는 국왕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자 정치이념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런 논쟁을 복제를 두고 벌인 싸움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올바른 해석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나아가 성경을 근거로 주장을 내세우려면 더욱 이런저런 문헌을 읽으면서 균형을 잡아가야 한다. 오늘날 그런 노력 없이 성경을 문자로만 이해하는 이들의 주장이 사방에 난무하고, 그것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일부 목회자들이 이들을 오도하는 것으로 모자라 부추기기까지 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각 분야에 걸친 방대한 법령을 기준으로 준법과 위법을 가른다. 그 방대한 법령으로도 매사를 다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수시로 제정과 개정을 하고, 판례를 따르기도 한다. 결국 법령 적용은 해석의 문제라는 것이다. 성경이라고 이와 다를까.
잭 로저스는 그의 저서 <예수, 성경, 동성애>[46]에서 동성애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에 앞서 먼저 성경이 오용된 사례를 살핀다. 그 결과 놀랍게도 노예제도, 인종차별, 여성차별의 사례가 모두 같은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먼저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편견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 그 편견을 성경에 대입해서 읽었다는 것이다. 편견을 합리화할 수 있는 본문을 찾았다는 것이니, 이는 오용이 아니라 악용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비록 의도한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200년 이상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대해 이렇게 믿어왔다. “1) 성경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2) 아프리카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해서 온전한 크리스천 백인들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다. 3) 아프리카 사람들은 죄로 가득하며,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어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 지금 누구도 동의하지 않으며 심지어 범죄로 여기는 이 생각을 그들은 창세기 9장 ‘함에 대한 저주’ 본문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들은 당시 최고의 사상가이고 또한 교회 지도자였다.
이와 똑같은 전제가 여성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 본문을 근거로 여성차별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1) 성경은 여성(하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2) 여성은 도덕적으로 열등해서 온전한 백인 남성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다. 3) 여성들은 의지적으로 죄를 많이 짓고,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어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한 구조와 동일하다.
잭 로저스는 이와 같이 성경을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한 구조가 동성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1) 성경은 동성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2) 동성애자들은 도덕적으로 열등해서 온전한 이성애자 기독교인의 수준까지 올라올 수 없다. 3) 동성애자들은 의지적으로 죄를 많이 짓고,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어서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것인데, 구조가 앞의 두 사례와 놀랍도록 닮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주장이 오늘 우리 교회에서 동일하게 되풀이 되고 있지 않은가?
성경으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정당화한 사람들이 모두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이었거나 그들의 행동이 모두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경을 악용한 것이 되었다. 나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동성애 논쟁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라는 용어는 1867년에 크라프트에빙(Kraft-Ebing)이라는 독일인 의사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며, 스스로를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인식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고대 로마 이전에는 성적지향에 대한 이해도 없었고 당연히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와 같은 범주로 나눌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약학자인 빅터 폴 퍼니쉬(Victor Paul Furnish)는 그의 저서에서 “바울서신에 대한 연구 결과 사도들이 동성애에 대해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당시 동성애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47]고 밝히고 있다.
또한 김근주 교수는 1) ‘동성애’는 구약과 신약 본문에 나타난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전혀 부적합한 단어이며, 2) “구약과 신약 본문이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식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현대적 개념을 고대 본문에 대응시킨 ‘시대착오적 표현’이고, 3) 따라서 ‘동성애’에 대해 성경이 다룬다고 여겨지는 내용은 모두 동성 간에 이루어지는 성행위라는 점에서 ‘동성 성행위’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동성애 측에서는 ‘동성애’와 ‘동성 성행위’를 나누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그러나 잭 로저스는 “이성애자의 성관계가 도덕적일 수도 있고 부도덕할 수도 있는 것처럼, 동성애자의 성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서술한다. ‘쾌락을 목적으로 한 무분별한 성행위’와 ‘성 정체성의 차이로 인한 성행위’를 동일하게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동성애로 해석되는 구절은 모두 일곱 곳으로, 각각 “상관하다, 남자와 동침하다, 관계하다,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다, 탐색하다, 남색하다”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구절들이 지금 논란이 되는 동성애를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반동성애 측에서는 이 구절을 동성애를 금하는 명령으로만 인용할 뿐, 이 구절이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음 글에서 해당 구절을 하나하나 살펴보겠다.
[46] <예수, 성경, 동성애> 잭 로저스,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년 12월
[47] <The Moral Teaching of Paul> “Our examination of representative ancient sources, including two specific passages in Paul’s Letters, has shown that apostles, strictly speaking, said nothing about homosexuality. As noted earlier, this and related terms (including heterosexuality and bisexuality) were coined only in the latter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during the early phases of research into sexual orientation, of which there was no conception in the ancient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