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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Review

<영화> 나의 산티아고

영화 이야기

by 박인식

독일영화, 2015년, 1시간 32분

줄리아 폰 하인츠 감독, 데비드 스트레에소브 주연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삶도 언젠가 한 번 매듭을 지어야 하리라 생각했던 터라 그것이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친구 하나가 그 길을 가려고 스페인어 강좌에 등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막연하던 생각이 구체적인 계획이 되었다. 소설가 서영은 선생이 그 길에서 성령의 만지심을 네 번이나 경험했다는 글을 읽고 그 계획이 열망이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여러 갈래가 있고, 그러다 보니 거리도 조건도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자체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꽤 긴 시간을 일상에서 떠나 오로지 걷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고, 걷는 동안 깊은 묵상 가운데 내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충분히 시간을 가져야 할 만큼 멀되 걷는 게 너무 고달프면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으니 그 중 잘 알려진 길을 걷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킬로미터 ‘까미노 프랑세즈(프랑스길)’를 걷기로 했다. 대충 40여일 걸린단다.


줄잡아 40여일을 걷자면 준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을까. 나중에는 손톱깎이 하나라도 버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야할 만큼 배낭이 주는 무게감도, 때로는 빗속을 걷고 변변치 않은 숙소에서 낯선 이들과 부대끼는 일도 만만한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서영은 선생은 산티아고는 죽을 만큼 고독할 때 떠나는 길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계획을 잘 세워서 도전에 성공해야 하는 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혹시 선생이 말한 고독은 절박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젊은이들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인생의 전환점에 서있는 사람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걸으려고 할 때, 황혼에 접어든 이들이 지내온 삶을 돌아보며 남은 시간 삶을 잘 마무리하고 싶을 때, 굳이 그 고단한 길을 걷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철저하게 혼자, 요령 피우지 말고, 온전히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정상의 자리에서 쓰러져 수술을 받고 곧이어 찾아온 무력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산티아고를 찾아 나선 코미디언 하페는 순례자로서 불량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순례’는 ‘걷는 것’임에도 하페는 버스도 타고 택시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순례객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허름하고 불편한 숙소를 견디지 못해 호텔을 찾고 레스토랑을 찾는다. 결국 그는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굳이 고독을, 고통을 감내할 만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례를 포기한 날 저녁을 먹으러 간 하페는 우연히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 모두를 한 자리에서 만난다. 저녁 먹으며 나눈 대화는 특별하지 않았다. 암 투병 중이던 딸이 산티아고에 간다는 걸 말리다 못해 따라나섰던, 결국 그 길에서 딸을 떠나보내야 했던 스텔라가 “나는 길에서 매일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을 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하페는 어렸을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순례를 이어간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 결정을 번복한 이유를 하페의 입으로도, 정황으로도 설명하지 않는다. 하페는 길에서 눈물을 터트리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신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그가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을 짐작할 만한 이유도 그런 정황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냥 이해가 됐다.


나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삶의 매듭을 지을 생각으로 산티아고를 생각했고, 매듭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성령의 만지심을 경험하기를 기대했다. 서영은 선생처럼 네 번씩 경험할 욕심은 이미 버렸다. 그저 한 번이면 족하리라 생각했다.


성령의 만지심을 경험한다는 건, 신을 만난다는 건, 어떤 모습이고 어떤 느낌일까?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달라지기는 할 것이지, 달라진 모습이 얼마나 이어질 수 있을지. 그곳을 걷겠다는 열망만 가지고 있는 나는 그 길에 대한 기대만 있을 뿐 그 길 이후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걸어보지 못한 그 길을 걸은 하페는 많은 것을 깨닫는다.


“돌이켜 보니 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고, 그래서 매일 만났고, 신을 통해서 나를 만났다. 세상은 혼자 걷는 것인 줄 알았지만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이곳만이 순례길이 아니라 내 삶이 순례길이었다. 그 길은 평생을 걸어야 하는 긴 여행이면서 동시에 매일 아침 새롭게 떠나는 수많은 작은 여행이었다.”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 하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사람의 힘을 모두 빼앗아 갔다가 그 몇 배의 기쁨을 순례길의 끝에서 돌려준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길을 몇 년째 벼르기만 하고 아직도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영영 못 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을 만나는 순례길이 반드시 그곳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철저하게 고독해졌을 때, 도저히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박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과감하게 일상과 단절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이라면 어디든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직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말은 그만큼 고독하지 않고, 그만큼 절박하지 않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친절하지도 않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 산티아고에 대한 열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영화가 아니다. 산티아고를 그리는 사람들에겐 감동적일 수 있으나 철저하게 고독해보지 않은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부딪쳐보지 않았던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산티아고를 찾을 일을 없겠다는 말이다.


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었을까 하는 것보다 그 무거운 것을 어떻게 메고 다녔을까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 다녀온 사람들은 그 길을 회고하면서 하나같이 배낭의 무게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래서 손톱깎이 하나도 버릴지 말지 매일 고민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살림은 늘어나게 마련이지만 산티아고에서는 하나 같이 떠날 때보다 도착할 때 짐이 가벼워진단다. 그러니 평소 얼마나 쓸데없는 짐에 집착하느라 고단했는지 깨닫고, 쓸데없는 짐을 버리는 것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산티아고는 걸을 만하지 않은가?


이 영화에는 독특한 모습이 몇 눈에 띈다. 영화 시작할 때 나오는 사막을 방불케 하는 광야 길과 좁고 가파르고 험악한 산길은 다른 산티아고 영상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했다. 아마 그 영상을 봤더라면 오래 전에 산티아고 꿈을 접었을 것이다. 하페에게 그 길이 얼마나 큰 도전이었는지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면 다행이겠는데.


코미디언이 주인공이었지만 결코 코미디일 수 없는 영화인데 유튜브는 영화 장르를 코미디로 분류했다.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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