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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2022.09.11 (일)

by 박인식

혜인이네 동네는 포도밭 한가운데 있다. 둥근 박을 엎어놓은 것 같은 지형 꼭대기에 동네가 있고 사방으로 비탈져 내려가는 언덕이 모두 포도밭이다. 혜인이 졸업한 학교 이름도 ‘포도밭 초등학교’란다. 그러니 와이너리도 많고 와이너리에서 여는 축제도 많다. 아침에 포도밭을 한 바퀴 돌아오는데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 붙여놓은 걸 보고 동네 와이너리를 찾았다.


혜인 엄마는 와이너리에 간다면서 통을 들고 나오길래 뭐냐고 물으니 와인 받아올 통이란다. 2리터는 좋이 되어 보이는 통인데 그리로 와인을 채워오는데 채 만 원이 넘지 않는다. 마치 옛날에 주전자 들고 술도가에 가서 막걸리 받아오는 격이다.


술을 좋아하고 취향은 있지만 그저 좋은 사람과 좋은 자리에서 마시는 걸 최고로 여길 뿐 딱히 가리는 건 없다. 한국에서 와인이 대중화된 것이 벌써 오래 전 일이고 이래저래 마실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맛도 잘 모르고 와인에 대한 상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향긋하고 달콤하면 좋고, 뒷맛이 있으면 더 좋은 정도일 뿐이다.


집 앞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파는 와인은 한 병에 팔천 원 남짓하다. 그게 좋은 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향긋하고 달콤해서 입에 달고 산다. 버릇이 드니 책 읽으며 한 잔, 심심해서 한 잔, 심지어는 김치찌개 먹을 때도 한 잔 곁들인다. 마음 같아서는 짐 가방 채울 만큼 사들고 가고 싶은데 입국할 때 술은 가격에 관계없이 두 병만 보내준다니 그거라도 들고 갈까 말까 생각 중이다.


와인을 주문하려니 두 면 가득한 메뉴를 내놓는다. 모르겠고, 달콤한 것으로 달라고 했다. 아내와 그거 한 잔씩 놓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 한 번 쳐다보고, 그러다 옛날 얘기 하나 하고. 바람 좋은 일요일 오후, 여행으로 찾았으면 느껴볼 수 없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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